“젊은 날의 다산은 정말 대단했다. 말하자면 좀 돌격대장이었고 다혈질이었다. 수틀리면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이 젊은 시절 쓴 일기를 처음으로 주석을 달아 완역한 정민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젊은 시절의 ‘인간 정약용’에 대해 “정면돌파, 각개격파하고 들이받은 인물”이라고 정리했다.
정 교수는 이달 9일 ‘다산의 일기장’(김영사) 출간을 앞두고 3일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연 기자간담회에서 이같이 밝혔다. 고전학자인 정 교수는 다산의 일기 4종을 완역했다. 다산의 생애에서 가장 격렬하고 긴장감이 높았던 30대 시절 기록이다. 1795년 주문모 신부 검거 실패에 연루된 33세의 다산이 충청도 금정찰방으로 좌천된 시기에 쓴 ‘금정일록’부터 1796년 겨우 상경해 실직 상태에 있던 시절의 ‘죽란일기’, 같은 해 규영부 교서관으로 복귀한 시기의 ‘규영일기’, 1797년 외직인 황해도 곡산부사로 밀려나기 전까지 쓴 ‘함주일록’을 우리말로 옮기고 주석을 더했다.
정 교수는 “4종의 일기는 다산의 천주교 신앙 문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연관이 있다”며 “말 한마디에 가문의 명운과 죽고 사는 문제가 걸려 있었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다산은 반대파로부터 천주교 세력의 배후라며 공격받았고, 이후 금정찰방으로 좌천된 시기에는 천주교 세력의 지도자 이존창을 검거하는 데 성공한다. 당시 많은 지식인처럼 다산도 유학과 서학 사이에서 고뇌하며 양쪽을 오갔다.
정 교수는 “다산이 천주교를 배교한 것도 진실, 배교하지 않은 것도 진실”이라며 “다산이 왜 이 시절에 앞뒤 다른 행동을 하고 겉과 속이 다른 말을 했을까 (일기를 통해) 섬세하게 들여다보는 것이 다산의 온전한 실상, 나아가 그 시대의 실상을 회복하는 출발점”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절대 다산을 천주교인으로 만들거나 순수한 유학자라고 주장하려 이 책을 쓴 것이 아니다”라며 “다산은 그 중간에 있었고 이를 들여다볼 때 시대의 진실이 드러난다”고 강조했다.
다산의 일기는 개인감정이나 평가를 드러내지 않고, 사실들만 담담히 기록했다. 정 교수는 “다산의 일기는 훗날 독자를 염두에 둔 글쓰기로 독자에게 남기고 싶은 진실이 행간에 계속 드러난다”고 설명했다. 당시 시대상과 인물 간의 관계 등을 참고해 ‘행간’을 드러내다 보니 이 책은 일기의 본래 분량보다 훨씬 두툼해졌다.
정 교수는 “완전무결하고 애민정신의 화신이 된 다산 말고 분노하고 전투적으로 싸운 다산이 있었기에 (훗날) 강진 시절의 다산이 가능했다”며 “그때의 다산도 오늘의 우리도 똑같이 치열한 삶을 살아가고 있기에, 격동의 시대에 온몸으로 맞부딪친 다산이 보여준 통찰과 고민, 극복의 과정을 (독자들이) 살펴서 우리 가치로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