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메뉴 보기 검색

1969년 대한민국 상공서 사라진 여객기…‘그 날’ 무슨 일이 [그해 오늘]

1969년 12월 11일. 강릉에서 출발해 김포로 향하던 대한항공 여객기가 이륙 14분 만에 공중에서 납치됐다. 기내에는 한국인 승무원 4명과 승객 46명이 타고 있었다. 

 

(KBS News 유튜브 영상 캡처)

여객기는 승객으로 위장해 타고 있던 간첩 조창희씨에 의해 공중 납치돼 오후 1시 18분쯤 북한의 선덕비행장에 강제 착륙했다. 

 

강릉에서 출발해 서울로 향하던 대한항공 NAMC YS-11기 국내선 여객기가 항로를 이탈한 ‘KAL기 납치 사건’이다. 

 

이날 낮 여객기는 대관령 상공을 지나고 있었다. 갑자기 객석 맨 앞자리에 앉은 간첩 조씨가 권총을 들고 조종실로 뛰어들었고, 그때부터 북쪽으로 기수를 틀게 됐다. 

 

사건 발생 후 약 30시간이 흐른 12일 북한 평양방송은 착륙 지점을 밝히지 않고 KAL YS-11기가 두 조종사의 자진 입북으로 북한에 도착했다고 보도했다.

 

북한은 1970년 2월 5일 납북자들을 송환하겠다고 공표했으나 이 중 승객 11명은 송환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우리 정부는 전원 송환을 요구하며 협상을 벌였지만 결국 2월14일 판문점을 통해 39명만 송환받고 사건이 종결됐다. 

 

11명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2001년 2월에는 송환되지 못한 승무원 중 한 명이었던 성경희씨가 제3차 이산가족 방북단으로 평양을 방문한 자신의 어머니를 만나기도 했다.

 

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1970년 1월 7일부터 공항에서 경찰이 보안검색을 실시토록 했다. 

 

당시 북한 공작원 조씨는 육군 준장 계급장을 단 제복을 입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당연히 받아야 할 보안검색을 받지 않은 채 VIP 대우로 탑승했던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보안검색 초기에는 경찰이 일일이 짐을 열어 흉기나 총기류 등 무기가 있는지 눈으로 확인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다 같은해 2월 26일부터 무장경찰이 기내보안요원(보안승무원)으로 항공기에 탑승해 더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이후  ‘항공기 탑승객에 대한 검문검색 강화’, ‘공항직원에 대한 사법권 부여’, ‘민간항공기 승무원들의 무기 휴대 허용’, ‘항공기 승객의 익명 및 타인 명의의 사용 금지’ 등 오늘날 항공기 보안검색의 가이드라인이 도입됐다. 

 

납북피해가족회 황인철 대표는 피해자들의 생사확인과 송환 등 구제조치를 요구하며 국가인권위원회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황 대표는 미귀환자 황원(당시 32세)씨의 아들이다. 

 

납북된KAL기 미귀환자인 황원 씨(오른쪽). 연합뉴스

그는 2018년 7월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에 “통일부를 상대로 북한 당국에 신병 인도 이행을 촉구하고 소재를 파악해달라고 요청했지만, 통일부가 아무런 조처를 하지 않아 기본권을 침해당하고 있다”며 진정을 냈다. 하지만 당시 인권위는 2021년 1월 통일부 장관에게 전후 납북자 생사 확인 및 송환을 노력해달라고 촉구하겠다며 사건을 각하했다. 

 

당시 인권위원회는 “북한의 폐쇄성과 함께 휴전 상황에서 평화적 통일을 위한 대화와 협력의 상대라는 특수한 남북관계 속에서 정부의 한계를 고려해야 한다는 점”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이에 황 대표는 불복해 지난해 6월 행정소송을 냈지만, 재판부는 인권위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피고(인권위)가 별도 조사권을 발동하지 않기로 한 것을 두고 부당한 조치라고 보기 어렵다”며 “납북자 송환 문제는 국가안보, 외교관계 및 대북정책과도 밀접히 관련된 부분이 존재하므로 피고가 실제 조사를 진행하더라도 국가안보 등과 관련된 세부적인 내용을 파악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한편, 이 사건을 배경으로 한 영화도 제작된 바 있다. ‘YS-11기’ 납북 사건과 1971년 대한항공 ‘F27기’ 납북 미수 사건을 연결지어 이야기를 각색한 영화 ‘하이재킹’ 은 당시 남북 갈등을 그려내 관심을 받았다. 


박윤희 기자 pyh@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