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비상계엄 사태’는 한국을 넘어 전 세계적 이목을 단숨에 집중시켰다. 세계 민주 진영의 대표적인 나라이자 한류 등 소프트 파워로 잘 알려진 대한민국의 낯선 민낯에 각국은 당혹감에 빠졌다. 현직 대통령의 이상한 계엄 선포부터 약 3시간 만의 국회 계엄 해제 의결, 다시 3시간여 뒤 대통령의 계엄 해제 선포, 탄핵 표결 당일 대통령의 석연찮은 대국민 사과, 여당의 집단 불참으로 탄핵 표결 불성립에 이르기까지 놀라움의 연속이자 ‘다이내믹 코리아’(역동적인 한국) 그 자체였다.
유럽 언론까지 1면에 한국의 비상계엄 사태를 실을 정도로 국제사회의 관심은 크다. 한국처럼 발전한 나라에서 갑자기 맞이한 계엄 국면의 비상식성을 파고드는 한편, 북한과 휴전 중인 한국의 내란 등 사회 혼란은 전쟁으로도 이어질 수 있어 남의 일이 아니라는 인식도 포착된다. 이런 이유로 지금껏 한국이 불명예스럽게 떠안았던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증시 저평가)는 한동안 더 강화될 조짐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신행정부 출범을 앞둔 중요한 시기에 전력 질주할 수 없게 된 한국과 일단 거리를 두려는 모습도 보인다. 대통령이 내란죄로 입건된 나라와 굳이 정상외교나 고위급 소통을 서두를 나라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런 대통령이 계속 자리를 지키면서 불확실성이 커지고 국민적 분노가 터져 나오는 상황이 지속하는 한 올스톱된 고위급 외교·안보 협의가 정상화되긴 힘들다는 관측이 나온다.
사태 직후 외신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한 제목은 ‘윤석열은 누구인가’였다. 비상계엄 선포를 상식선으로는 납득할 수 없기 때문에 이를 감행한 이가 어떤 사람인지 분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지난 약 5일간 해외 매체 및 국내외 전문가들의 분석을 중심으로 윤 대통령 관련 키워드를 정리해봤다.
◆‘권위주의’에 도박 건 무모한 지도자
민주화 이래 처음일 뿐 아니라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내용의 포고령, 국회 장악 등이 시도된 이번 계엄 선포는 권위주의로의 퇴행을 의미한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윤 정부는 민주주의 정상회의를 주최하고, 가치외교와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기치로 내걸어왔다. 대통령 본인도 헌법의 중요성을 강조해 온 법조인 출신이다. 그런 대통령의 위헌적 일탈이 갖는 파급력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는 관측이다.
비상계엄 선포 당일 영국 가디언은 ‘윤석열, 권위주의 향수에 도박한 것은 무모한 짓으로 판명’이라는 제목의 분석 기사를 냈다. 코너에 몰린 윤 대통령이 절박한 도박을 벌이기 위해 기댄 것이 권위주의라는 것이다. 가디언은 윤 대통령이 “권위주의에 대한 그의 향수가 일부 한국의 정치 진영에 공감을 얻을 것이라 생각했을지 모르나 계엄 해제에 국회 만장일치 투표가 나온 것은 그 계산이 잘못됐음을 시사한다”고 전했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도 윤 대통령의 비판 언론 저격, 권력을 사사롭게 사용했다고 받는 비난 등을 들어 윤 대통령의 권위주의 성향을 짚었다. NYT는 “윤 대통령은 소송, 규제 기관, 수사를 통해 자신이 허위 정보라고 부르는 발언을 단속해 왔으며, 이러한 노력은 주로 언론 기관을 겨냥한 것이었다”며 “경찰과 검찰은 일부 매체를 반복적으로 급습했다”고 보도했다.
북한에 대한 강경한 입장을 보여 온 윤 대통령이 오히려 북한 정권 수준의 권위주의를 추구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군사 독재 시절을 방불케 하는 무리한 계엄 선포 감행, 계엄 이후 개헌·장기집권을 염두에 뒀을 수 있다는 일각의 분석 등에 근거한 얘기다. 한 해외 외교 전문가는 이번 사태로 드러난 점을 보면 윤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되려 한 것이나 다름없어 보인다고 했다.
◆‘안티 페미니즘’ 정치의 예견된 결말
해외에서 윤 대통령과 관련해 주목하는 또 다른 키워드는 안티 페미니즘(반여성주의)이다. NYT는 윤 대통령이 누구인지 설명하는 기사 첫머리에서 “1% 미만의 차이로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후보 시절부터 재임 기간 내내 안티 페미니즘 물결과 동맹을 맺었다”고 했다. 가디언도 ‘계엄령을 시행하려다 실패한 논란의 대한민국 대통령 윤석열은 누구인가?’라는 제목의 기사 소제목에 윤 대통령을 “자신을 안티 페미니스트라고 밝힌 보수 성향의 전직 검사”라고 썼다. 영국 BBC방송은 “한국 사회가 젠더 문제로 인해 분열이 심화되고 있던 시기에 윤 대통령은 안티 페미니즘 정책을 내세워 젊은 남성 유권자들의 관심을 끌었다”고 설명했다.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을 정치적 자산으로 활용해 온 윤 대통령을 이 시점에 재조명한 것은 가부장적 권위주의에 기반한 이런 전략이 이번 사태와 연결고리가 분명하다는 판단에서다. 전 세계적으로 여성 인권이 위협받는 사회는 권위주의가 득세하고 민주주의가 위기를 맞는 모습을 공통적으로 보이고 있다. 정의당 장혜영 전 의원은 8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우리 사회의 반페미니즘과 거기에 편승한 정치가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어떻게 망치고 윤석열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는지 그 과정에 대한 철저한 복기가 필요하다”며 “지긋지긋한 집게손가락이 어떻게 기습 계엄까지 이어졌는지”라고 말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반영한 듯, 비상계엄 선포 날부터 지금까지 윤 대통령 탄핵을 외치는 시위에서 아이돌 응원봉을 든 20∼30대 여성이 어느 때보다 많다는 보도 및 집회 참여자들의 목격담이 이어지고 있다. BBC뉴스 코리아는 ‘계엄령 이후 시국선언 하고 광장으로 나온 여성들’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윤 대통령의 정책들이 구조적 성차별 개선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느낀 여성들이 더 적극적으로 거리에 나오고 있다고 보도했다. 여기엔 윤 대통령이 ‘여성가족부 폐지’ 7글자 공약 등으로 20대 남성과 가부장적 보수주의자들을 겨냥해 대선을 승리한 시점으로 이번 사태를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맥락이 있다. 분노한 여성 유권자들의 손으로 여성혐오 정치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나섰다는 설명이다.
◆대통령 탄핵 생존, 나라는 ‘불확실성’ 수렁
초유의 계엄 사태 이후 대통령 하야 또는 탄핵 수순을 예상했던 국제사회는 7일 국회에서 탄핵안 표결이 무산되자 또 한 번 경악했다. 외신들은 일제히 한국의 정치적 불확실성 장기화를 우려했다. 탄핵이 될 때까지 매주 발의하겠다는 야당과 표결하러 들어오지조차 않은 여당이 대치한 채 사태 수습이 길어질 수 있다는 관측에서다.
한국의 민주주의 회복력에 놀랐다는 국제사회는 단 며칠 만에 암담한 전망으로 돌아섰다. 탄핵을 막은 윤 대통령과 국민의힘이 거둔 ‘상처뿐인 승리’가 혼란을 키울 것이란 분석에서다. 칼 프리드호프 시카고글로벌문제협의회 아시아 연구 전문가는 월스트리트저널(WSJ)에 “윤 대통령이 국제사회에서 고립될 수도 있는 ‘피로스의 승리’(너무 많은 희생을 치르고 얻은 승리)일 수 있다”며 여당 역시 “국가보다 당을 선택한 최악의 결과”를 냈다고 비판했다. NYT와 워싱턴포스트(WP)도 각각 “워싱턴의 가장 중요한 동맹국 중 하나인 한국에 장기적인 정치 불확실성의 판이 깔렸다”, “탄핵안이 부결되면서 더 많은 정치적 혼란과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대중의 요구가 촉발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와 관련해 미국 정부는 향후 이어질 시위에 대해 한국 정부가 강경 진압 등을 할 가능성을 우려한 듯한 입장을 내놓기도 했다. 탄핵안 표결 무산 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 당국자는 “(한국) 국회의 결과와 추가 조처에 대한 논의에 주목했다”며 “평화롭게 시위할 권리는 모든 상황에서 존중돼야 한다”고 언급했다.
미국은 한국의 민주적 제도와 절차가 헌법에 따라 온전하고 제대로 작동할 것을 촉구한다고 거듭 강조하고 있다. 계엄 사태 등을 틈타 북한 관련 위협이 증가하는 상황을 우려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한·미동맹은 여전히 철통같으며, 미국은 한반도의 평화와 안보에 전념하고 있다”고 하지만 동시에 윤 정권 리스크가 빨리 해소되기를 원하는 모습이다.
지난 3일 윤 대통령의 계엄 선포 사실을 공유받지 못했다는 미국은 ‘패싱’ 사실에 불쾌함을 드러내고, 반헌법적 계엄령 발동을 강도 높게 비판해왔다. 탄핵안 표결 당일 일어난 일에도 불편한 눈초리다. 미 국무부가 운영하는 미국의소리(VOA)는 8일 대통령실에 ‘대통령 권한을 국민의힘에 양도하는 공식 절차가 있었는지, 법적 근거는 무엇인지’ 질문했다. 이에 대통령실은 뾰족한 답변을 내놓지 않으며 상황의 특수성에 대한 양해만을 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