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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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세 딸과 75년 만의 재회…4·3 희생자 귀향

1949년 광주형무소 수감 중 사망 후 행방불명
봉환식…유가족 한맺힌 기다림 끝

“얼마나 기다렸는데…돌아온다고 약속했잖아요. 왜 이러고 있어요. 말 좀 해요…”

 

제주 4·3 당시 육지 형무소에서 숨진 뒤 행방불명된 희생자가 75년만에 귀향해 백발의 딸과 재회했다.

 

17일 제주4·3평화공원 평화교육센터에서 열린 행방불명 4·3희생자 봉환식 및 신원확인 결과 보고회. 제주도 제공

제주도와 제주4·3평화재단은 17일 제주4·3평화공원 평화교육센터에서 광주형무소에서 숨진 4·3희생자 고(故) 양천종씨의 유해를 모시고 ‘행방불명 4·3희생자 봉환식 및 신원확인 결과 보고회’를 개최했다.

 

도외 지역에서 발굴된 4·3희생자 유해가 제주로 봉환되기는 지난해 북촌리 고(故) 김한홍씨에 이어 두 번째다.

 

제주시 연동리 출신인 고인은 4·3 당시 집이 불에 타자 가족들과 함께 노형리 골머리오름으로 피신했다. 1949년 3월 토벌대 선무공작으로 하산해 주정공장에서 한 달간 수용생활 뒤 풀려났으나, 같은 해 7월 농사일을 마치고 귀가하던 중 체포돼 광주형무소에 수감됐다.

 

가족들에게 마지막으로 전해진 소식은 1949년 11월쯤의 안부 편지였다. ‘형무소에서 잘 지낸다’는 내용의 편지 이후, 유족은 같은 해 12월 24일(음력 11월 5일) 형무소로부터 양씨의 사망 통보를 받았다.

 

당시 유족들은 시신을 수습하고자 밭을 처분하며 안간힘을 썼지만, 끝내 유해를 수습하지 못했다.

 

17일 제주4·3평화공원 평화교육센터에서 열린 행방불명 4·3희생자 봉환식 및 신원확인 결과 보고회. 제주도 제공

영문도 모른 채 75년 동안 낯선 땅에 잠들어 있던 유해는 최근 광주 북구 문흥동 옛 광주형무소터 무연분묘에서 발굴한 261구 중 하나다. 광주형무소는 1908년 광주감옥으로 출발해 1923년 광주형무소로 개칭됐으며, 1961년 광주교도소로 명칭이 변경됐다. 1971년 현재의 북구 문흥동으로 이전했으며, 이곳 무연분묘터에서 법무부 관리 111구를 포함해 총 261구의 유해가 발굴됐다.

 

신원 확인은 도외지역 발굴유해에 대한 유전자 감식 시범사업의 확장 과정에서 이뤄낸 성과다.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 조사위원회로부터 제공받은 광주형무소 옛터 발굴유해의 유전자 정보를 4·3 희생자 유가족의 유전자 정보와 대조한 결과, 새로운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유가족 등 봉환단은 전날 부여 영호추모공원에서 법무부 광주지방교정청에게서 유해를 인계받아 제례를 지낸 뒤 세종은하수공원에서 화장했다. 유해는 이날 김포발 항공편으로 제주에 도착했다.

 

제주공항에서는 고인의 딸 두영(94)씨를 비롯한 유족과 오영훈 지사, 도의회 의원들이 고인을 맞이했다.

 

17일 제주4·3평화공원 평화교육센터에서 열린 행방불명 4·3희생자 봉환식 및 신원확인 결과 보고회. 제주도 제공

이어 제주4·3평화공원에서 열린 봉환식에는 희생자 유가족과 오 지사, 박호형 제주도의회 행정자치위원회 위원장, 행정안전부 및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 관계자, 김창범 4·3유족회장 등 100여 명이 참석했다.

 

가족들은 유해에 이름표를 달고 헌화와 분향으로 희생자를 추모했다. 유가족 대표인 양성홍(76)씨는 “할아버지 유해를 수습할 수 있어 기쁘다”며 “4·3으로 희생된 모든 행불 희생자들이 하루빨리 고향으로 돌아와 가족 품에 안기길 바란다”고 말했다.

 

오 지사는 추도사를 통해 “75년이라는 긴 세월 유가족들의 원통함은 감히 짐작조차 하기 힘들다”며 “정부와 유전자 정보를 긴밀히 공유하면서 대전 골령골을 비롯한 경산 코발트 광산과 전주 황방산, 김천 등 4·3수형인의 기록이 남아 있는 지역에 대한 유해 발굴과 신원확인에 온 힘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제주=임성준 기자 jun2580@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