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작가가 2024년 노벨문학상을 받으며 한국 문학의 가능성을 세계에 알린 가운데, 한국 문학의 미래를 이끌고 나갈 신진 작가의 산실 세계일보 신춘문예 2025년 예심이 지난 6일 서울 용산 세계일보 사옥에서 성황리에 끝났다.
이번 예심을 통해 단편소설 13편과 시 15건이, 예심을 거치지 않는 평론 응모작들과 함께 본심으로 올라갔다. 예심은 소설가 안보윤, 정길연, 해이수, 평론가 오태호씨(이상 소설 부문), 시인 박지웅, 안현미씨(시 부문)가 각각 맡아서 수고해 주셨다.
지난 4일 마감된 2025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의 응모편수는 단편소설은 지난해 616편에서 올해 635편으로 소폭 늘어났다. 반면 시는 952건(1인당 3건 이상, 2856편 이상)에서 936건(2808편 이상)으로, 평론은 지난해 31편에서 24편으로 조금씩 줄었다.
최종 당선자에게는 이달 말 개별 통보되고 당선작은 세계일보의 2025년 신년호 지면을 통해 공개된다. 이번 신춘문예 응모작들의 경향과 표징을 예심 심사위원들(가나다 순)로부터 들어봤다.
◆소설 부문
안보윤 소설가=소설 속에서 더는 욕망하지 않는, 욕망할 기력조차 없는 인물들이 유독 눈에 띄었다. 이는 경제적 어려움과 사회적 고립, 정치적 혼란 속에 무기력해진 인물들이 자신의 삶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는 형태로 그려져 심사하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소설 속 인물들은 ‘충실할 필요가 없는 삶’에 대해 자조적인 목소리를 내는 경우가 많았다. 미래를 꿈꾸는 것이 가진 자의 특권인 만큼 열심히 살아봤자 더 나은 내일로 나아갈 수 없으니 욕망할 이유도, 성실할 필요도 없다는 식이었다. 무엇과도 싸우지 않고 우뚝 멈춰 있거나 지독한 방식으로 은둔하는 인물들이 세상을 응시하는 방식은 차고 건조했다. 그것이 때로는 지나친 정체로 느껴졌지만 그 또한 삶을 모색하는 다른 층위의 치열함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노인 화자를 내세우거나 노인을 돌보는 인물을 입체적으로 그려낸 소설도 상당했다. 서로 다른 위치의 인물들임에도 이들이 느끼는 고통의 근원에 단절감과 고립감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 또한 인상적이었다. 이제 소설 속 인물들에게 고단함과 외로움은 기본값이 된 듯하다. 그럼에도 소설마다 현실을 예민하게 감각하고 정확하게 묘파하려는 작가의 의지가 배어 있어 반가웠다. 직시할 수 있는 용기가 있는 한 우리의 삶이 다만 고되지만은 않을 것이다.
오태호 평론가=소설이나 영화보다 더 비현실적인 ‘비상계엄’의 여파가 대한민국을 강타하고 있다. 2016년 혹독했던 겨울과 2017년 따뜻했던 봄을 상기할 필요가 있는 긴박한 날들의 와중에 예심을 진행했다. 예년에 비해 안정감 있는 문장과 탄력적인 서사의 구성, 흥미로운 제재의 활용 등이 돋보였다. 이미 습작 수준을 넘어선 응모작들이 예심위원들의 고심을 깊게 만들었다. ‘병적 통증이나 가족의 애환, 학교 폭력, 직장 문제, 일상 문화, 예술가적 기질, 이국 지향성’ 등의 통상적인 접근뿐 아니라 ‘1인 방송과 SNS의 활용, 생성형 인공지능과 알고리즘, 이주 노동자와 해고 문제, 소행성 충돌과 외계인, 성 소수자 이야기나 오디션 프로그램’ 등을 활용한 서사의 풍경에서 숙련된 창작자의 깊은 심연과 내적 고투를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주제와 서사의 균형 감각 속에 독자를 설득하는 유려한 문체, 비유와 상징을 내포한 특이 소재의 활용, 유기적 구성이 안정적인 작품들을 주목하였다. 일상성과 특이성을 조화롭게 빚어내는 예비 작가들의 분투에 격려를 보낸다.
정길연 소설가=지난해와는 다른 경향을 보이는 것 같다. 한동안 자주 접했던 다중우주적 세계관, 초자연적 시공간 이동, 판타지 유의 소재는 확연히 줄었다. 대신 지구의 삶에 근근이 복무하며 대안 없는 오늘, 지리멸렬한 일상,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볼모가 된 자아 등 개인의 부침을 기록한다. 하지만 발밑에 집중하느라 이면과 너머에 도달하지 못해 글쓴이 또는 화자만의 혼잣말이 되어버렸달까. 응모작 상당수는 무슨 말인가를 하고 싶어 하는 것 같기는 한데 소통을 훼방하는 자의식 과잉으로 인해 작의가 흐릿해지고 만다. 불의하고 무도한 시대가 창작자의 심리적 위축과 보폭의 축소를 가져온 것인지 인물들의 운신이 비좁고 덤덤해서 뜨겁고 매운맛이 덜하다. 그럼에도 전체적으로 문장 구성력, 구조적 완성도 등 창작에 필요한 기량은 해마다 상향 평준화하고 있다. 조선 시대가 배경인 두 작품이 기억에 남는다. 각각 명검과 천주교박해를 다루었는데 두 편 다 소재에 대한 탐구와 이해가 상당했다. 다만 전자는 예측가능한 그래서 다소 식상한 전개가 아쉬웠고, 후자는 서늘하기 그지없는 문체와 냉연한 관점이 매력적인 미장센을 그려 보여 주었음에도 큰 덩어리에서 잘라낸 일부분인 듯 완결되지 않은 인상을 남겼다. 단편보다 중, 장편에 어울리는 서사여서 새로운 시도를 권해본다.
해이수 소설가=‘일상의 소소한 사건 중시, 앱(App)으로 소통하는 사회’. 전반적으로 투고작이 다룬 내용은 뜨거운 사회적 이슈와 거시적 갈등보다는 삶의 일상에서 벌어지는 미세한 사건이었다. 특히 컴퓨터와 모바일 디바이스에 깔린 다양한 애플리케이션이 등장했는데 중고거래, 금융투자, 패션 뷰티, 데이트, 동호회, 챗GPT 등으로 단자(單子) 간의 창을 열고 다른 세계와 소통을 시도했다. 이 중에서 유튜브는 손가락을 타고 시도 때도 없이 소환 복사 편집되거나 공유 재생산되고 이 과정이 동시다발적으로 반복되며 공포를 몰고 오는 차가운 유령으로 묘사되었다. 전에 강세를 보이던 국외체험, 평행우주, 멀티버스, 안드로이드는 대폭 줄었으나 ‘죽음’만은 여전히 상당했다. 화장, 성묘, 이장, 추모, 애도, 묘석, 안락사, 유언 등이 제목으로 나오거나 소재로 다루어졌다. 응모자의 연령층이 한층 젊어졌는데, 뚜렷한 이유 없이 ‘한 줄 띄기’를 하는 경우가 많아서 개인적으로 우려스러웠다. A4용지 17장 분량에 140회가량 ‘한 줄 띄기’를 한 글도 보였다. 일상의 사건을 다루는 것도 중요하지만 언뜻 평범하게 보이는 이 해프닝을 ‘비범하게 부각시키는 전략’이 더 중요하다. 이런 점에서 소설가는 서사적 구조의 전략가이자 치밀한 구성의 전술가이다.
◆시 부문
박지웅 시인=예심은 정해진 시간을 꼬박 채우고 초읽기까지 몰렸다. 해를 거듭할수록 세련되고 노련해지는 문장 덕분에 진땀을 뺐다. 양극화 사회, 환경, 인권, 실업 문제 등을 작품에 성공적으로 연결하고, 부조리와 이상 징후에 대해 질문을 거두지 않은 작품에 믿음이 갔다. 반면 대상에 상투적으로 접근하거나 사유의 뼈대가 보이지 않는 순살 아파트, 이미지의 화소가 낮아 불명료한 부분은 패착이라 여겼다. 난해하거나 실험적인 작품은 거의 보이지 않았으나 응모작의 시적 성취도가 고르고 높아 심사위원 간에 통과 불통을 묻는 일이 어색하지 않았다. 깊은 사유와 독창적 이미지에 명증성을 갖춘 작품을 만나는 즐거움이 컸다. 새로운 시적 발화점과 낯선 감각에 대한 갈증은 연령층을 가리지 않고 나타났는데, 외국어를 주요 소재와 제목으로 내세운 작품이 많았다. 2024년 한국 1인가구 수는 782만. 1인가구가 중요한 주거 형태로 자리 잡았고, 그에 따라 작품 속 공간과 대상도 다양하게 바뀌고 있다. 가족공동체와 전통적인 공간보다는 개인의 내밀한 서정성과 현대적 시공간에 대한 미학적 접근이 보였다. 겉보기에 시는 다소 홀가분해지고 그 속은 한결 외로워 보였다.
안현미 시인=신춘문예답게 세대별 지역별로 다양한 분들이 투고해 왔고 작품들의 소재와 주제 역시 다양하고 풍성했다. ‘형태시’나 ‘구성시’, AI를 활용한 ‘실험시’ 등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띄었다. 이 성찬에 기뻐하면서, 세계를 바라보는 자기만의 탐색이 있는지 그 탐색을 압축적인 시적 언어로 잘 보여주고 있는지를 염두에 두고 예심에 임했다. 가족사의 아픔과 비극, 고독과 우울에 시달리는 현대적 삶의 문제, 전지구적으로 펼쳐지고 있는 전쟁과 기후 위기 등 다양한 문제들을 자신만의 감각과 사유를 담아 ‘시’라는 형식으로 완성하는 일은 어쩌면 완성할 수 없는 일을 완성하는 일에 가깝겠지만, 그 어려움 가운데 자신만의 상상세계와 목소리를 발견하고자 애쓴 시간이 축적돼 높은 완성도를 보여준 작품들을 선별해 본심에 올렸다. 한국의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뜻깊은 해에 모국어의 전통과 아름다움에 바탕해 삶의 가치와 의미를 깊이 천착한 작품에 영광이 주어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