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취임을 약 한 달 앞두고 본격적인 2기 운영의 시동을 걸고 있다. 트럼프 당선인은 취임 후 사실상 처음으로 가진 기자회견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내기 위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대화하겠다고 밝혔다. 이날 회견에서 트럼프 당선인은 한국 주변의 북·중·일·러 정상과의 회담 가능성을 열어뒀지만 한국은 언급하지 않았다. 트럼프 2기 출범 등으로 국제 정세가 요동치는 전환기에 윤석열 대통령 탄핵으로 ‘리더십 공백’ 상태인 한국이 외교·경제 협상에서 소외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트럼프 당선인은 16일(현지시간) 플로리다주 팜비치 마러라고 리조트에서 손정의(孫正義·일본명 손 마사요시) 일본 소프트뱅크 회장의 대미 투자 발표를 계기로 가진 기자회견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끔찍한 대학살”이라며 “멈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푸틴 대통령, 젤렌스키 대통령과 대화를 나눌 것”이라며 “나는 이를 멈추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협상할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너무 많은 사람이 죽고 있다”고 한 뒤 푸틴 대통령에게도 “협상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 대해선 또다시 “내가 잘 지내는 또 다른 사람”이라고 언급했다.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일본 총리와의 회동 가능성에 대한 질문엔 “그들(일본)이 원한다면 나는 그렇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당선인은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취임식에 참석하는지에 대해선 “잘 모르겠다”고 했으나, 이어 “미국과 중국은 세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시 주석과 특히 편지를 통해 아주 좋은 대화를 나눴다”며 “(시 주석은) 내 친구였고, 놀라운 사람”이라고 강조했다.
트럼프 당선인이 이날 기자회견에서 언급한 김 위원장, 시 주석, 이시바 총리, 푸틴 대통령은 공교롭게 모두 한국 주변국들의 정상들이다.
◆국제정세 요동치는데… 韓, 통상·안보 대처 ‘속수무책’
우크라이나 전쟁과 미국의 대중 전략경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미국의 정권 교체로 지역 정세가 요동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은 트럼프 당선인과 직접 대화할 리더십이 공백인 상황이어서 통상, 안보 양면에서 대처하기가 어렵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트럼프 당선인은 중국 등에 대한 고관세 부과와 관련한 질문에는 “그들(다른 나라)이 우리에게 세금(관세)을 매기면, 우리도 같은 금액을 과세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거의 모든 경우 그들은 우리에게 세금을 매기고 있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관세와 관련된 협상 방안이 검토 중인지를 묻는 말엔 “우리는 위대한 협상을 할 것이다. 우리가 모든 카드를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고율 관세 부과 시 인플레이션 악화 우려를 묻는 질문에는 “관세는 미국을 부유하게 만들 것”이라며 일축했다.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 지명자도 이날 기자회견에 함께해 이 같은 트럼프 당선인의 발언을 거들었다.
앞서 이날 로이터통신이 트럼프 인수팀의 내부 문건을 확인했다며 보도한 바에 따르면 인수팀은 인플레이션감축법(IRA)에 근거한 전기차에 대한 세액 공제, 충전소 지원 보조 등 지원책을 줄이고 배터리와 핵심 광물, 충전부품 등 전기차 공급망에는 전 세계적으로 관세를 부과하는 등의 계획을 하고 있다. 특히 중국이 주요 대상이다. 흑연과 리튬, 희토류 등 전기차 배터리와 군 항공기 등에 동시에 사용되는 핵심 광물의 채굴 및 정제를 중국이 주도함에 따라 미국의 전략적 취약성이 커지고 있다는 판단에 근거한다. 이날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조 바이든 행정부는 최첨단 반도체뿐만 아니라 자동차와 가전제품 등에 사용되는 중국산 레거시 반도체(범용 반도체)까지 대상을 넓혀 불공정 행위 조사에 착수할 전망이다. 조사는 트럼프 행정부로 넘겨져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다만 트럼프 당선인은 바이든 행정부가 추진한 틱톡금지법에 대해선 구제 방안을 모색할 것을 시사했다. 그는 중국계 짧은 동영상 플랫폼인 틱톡의 향후 운명과 관련한 질문에 “나는 틱톡에 대해 따뜻한 감정(a warm spot)을 갖고 있다”며 “(구제 방법을) 살펴보겠다”고 답했다. 그는 “내가 젊은 층(유권자)에서 34%포인트 차로 이겼는데, 틱톡이 이와 관련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덧붙였다. 시 주석에게 손을 내밀고 있는 트럼프 당선인의 대중 정책이 강경 일변도만은 아니라는 점을 시사한다.
트럼프 당선인은 또 “취임 첫날부터 미국을 완전하게 다시 번영시키기 위해 일련의 대담한 개혁을 신속하게 시행할 것”이라며 “1개의 새 규제를 만들면 기존 규제 10개를 없애는 것을 비롯해 일자리를 죽이는 규제를 대폭 감축하기 위한 준비가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또 제프 베이조스 아마존 최고경영자(CEO)를 만날 예정이며, 마크 저커버그 메타 CEO, 세르게이 브린 알파벳 공동창업자 등 빅테크(거대기술) 기업 거물들과 만났다고 확인했다. 그는 “(집권) 1기 때는 모든 사람이 나와 싸웠지만, 이번에는 모든 사람이 내 친구가 되고 싶어한다”고 주장했다.
이날 행사는 손정의 회장의 1000억달러(143조6000억원) 규모 대미 투자 계획 발표를 위해 기획됐다가 현안에 대한 질문이 이어지면서 사실상의 트럼프 당선인의 대선 승리 후 첫 기자회견이 됐다. 트럼프 당선인은 손 회장의 투자 발표가 있은 뒤 “이 자리에서 바로 물어보겠다. 투자금액을 2000억달러(약 287조7000억원)로 늘려 주실 수 있겠나”라고 물었는데, 손 회장은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 보겠다”며 “트럼프는 정말 뛰어난 협상가”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트럼프 당선인은 이날 회견에서 멜라니아 여사와 함께 전날 고(故)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일본 총리의 부인 아키에 여사와 만찬을 한 사실도 알렸는데 트럼프 당선인과 일본의 밀착이 1기 못지않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트럼프 당선인은 앞서 우크라이나 전쟁 상황을 언급하면서 중동 상황에 비해 어렵다며 바이든 행정부가 우크라이나에 러시아 본토를 깊숙이 타격할 수 있는 미국산 장거리 미사일 사용을 승인한 것을 비판했다. 최근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의 통화에서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에 대한 질문엔 “진짜 대화는 내년 1월 20일(취임식) 이후에 시작될 것이지만, 우리는 정말 좋은 대화를 나눴다”며 “중동에서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