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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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윤의어느날] 신발장 깊숙이 숨겨둔 것

한낮인데도 집 안은 고요하고 어두웠다. 나는 방에 펼쳐진 낮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초록색 부직포가 깔린 책상 위로 모서리가 둥근 벼루와 먹, 물이 담긴 연적과 마른 수건이 놓였다. 연적은 맑은 백색의 오리 모양이었는데 책상 위에 놓인 것 중 내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물건이었다. 나머지는 다 싫었다. 왜냐하면, 지루하고 피곤한 것들이었으니까. 초등학생에서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나는 그 책상 앞에 자주 앉았다. 허리를 곧게 펴고 정갈한 각도로 팔을 굽혀 먹을 가는 일. 부드럽게 먹을 잡아 벼루에 수직으로 세운 뒤 바닥면이 온전히 갈려 나가도록 주의를 기울이는 일. 그것이 내가 해야 하는 일이었다. 엄마는 서예를 시작한 뒤로 종종 내게 먹을 갈게 했다. 평소엔 사각 벼루에 밋밋한 모양의 먹을 갈았다. 대회에 출품할 작품을 쓸 땐 용이 돋을새김 되어 있는 모서리가 둥근 벼루에 금박 입힌 한자가 새겨진 먹을 갈았다.

나는 놀고 싶었고 어느 날엔 공부나 숙제를 하고 싶었다. 먹 가는 일만 아니라면 뭐든 좋았다. 책상에 팔꿈치를 괸 채 건성으로 손을 움직이거나 빨리 갈아버릴 심산으로 뻑뻑 소리가 나도록 힘을 줘 먹을 그어대는 날이 많아졌다. 어떻게 갈든 결과물은 그저 새까맸다. 엄마는 왜 혼자 먹도 못 가는 걸까 투덜댔지만 사실은 알고 있었다. 엄마는 원하는 만큼 양껏 글씨에 집중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남편과 세 딸이 먹을 음식을 만들고 설거지하고 집 안을 청소하고 각종 옷가지와 실내화를 빨고 눈이 툭 튀어나온 금붕어들이 헤엄치는 어항을 청소하는 일까지 모두 엄마의 몫이었으니까. 먹을 가는 일만이라도 누군가 도와줬으면 했겠지. 그래도 싫었다. 꼼짝없이 방에 갇혀 한 시간씩 먹을 가는 일도, 벼루의 움푹한 부분에 고인 먹물이 진득해지는 것도 지겹고 싫었다.

그래서일까. 내가 쥔 먹에 차츰 경사가 지기 시작했다. 바닥면이 어슷해지다 모서리 하나가 뾰족해지더니 먹을 움직일 때마다 작은 조각으로 부서졌다. 깨진 먹은 벼루에 얕고 긴 상흔을 남겼다. 잔가루가 생긴 먹물과 완전히 비뚤어진 먹. 먹 집게에도 제대로 잡히지 않는 그 먹을 엄마가 조심스레 갈기 시작했다. 엄마가 했어야 할 일이 엄마에게 되돌아간 것뿐인데 마음이 불편했다. 종이상자에 담긴 먹 조각이, 쓸모도 볼품도 없어진 그 조각들이 덜그럭대는 소리가 자꾸 귀에 울렸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 엄마는 서예를 그만뒀다. 십여 년을 붙잡고 있었던 데 비해 그만두는 건 순식간이었다. 집에 있던 서예 책상을 치워버린 뒤에는 단 한 번도 글씨 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싫증이 났나 보다, 나는 그렇게만 생각했다 이십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 엄마 집 신발장 꼭대기 칸에 쌓여 있는 빛바랜 화선지 뭉치를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맞춤한 나무 케이스에 담긴 모서리가 둥근 벼루와 동물털로 만든 붓이 꼭 한 세트 그곳에 있었다. 마음속에서 덜그럭덜그럭. 끝이 뾰족해진 먹 조각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보윤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