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사태’ 때 정말로 그렇게 사람이 많이 죽었나?” 1년 반쯤이 지난 어느 봄날, 어떤 교수의 연구실에 들렀을 때 교수는 그에게 호기심과 반신반의하는 눈길로 물었다. “자네도 직접 봤어?”
차마 대답할 기력마저 없었다. 광주를 떠난 지 두어 달 만인 그즈음, 그는 이미 당혹감에 빠져 허둥거리고 있었다. 믿기지 않았다. 그 엄청난 참상과 비극이 서울에선 고작 과장된 유언비어 혹은 소문으로만 존재하고 있다니. 신군부의 비상계엄 확대에 맞서 싸웠던 광주 사람들의 피눈물이 쏟아지는 ‘현실’이 서울에선 그저 한낱 믿기 어려운 흉흉한 ‘소문’일 뿐이라니.
신촌에 위치한 대학원에 진학한 소설가 임철우는, 1982년 처음으로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마포구 신수동의 작은 시장통 골목 끄트머리에 붙어있는 게딱지만 한 집에서 혼자 자취를 했다. 한 해 전 신춘문예로 등단한 그였다. 서울 생활을 시작하자마자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게 아니라고, 당신들은 아예 모르고 있다고. 흥분해 입에 게거품을 물고 그날의 일을 얘기해 주다가 문득 주위를 돌아다보면 모두들 잠자코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호기심과 반신반의, 혹은 냉소와 거부감을 감춘 냉랭한 눈빛들. 그 차분하고 이성적인 시선 앞에서 숨이 컥컥 막혔다.
언젠가부터 술에 취하면 목소리가 높아지고 말과 몸짓도 위태롭게 사나워졌다. 그 냉정하고 영리한 눈빛들을 빛내며 마주 앉아 있는 이들의 모습에 끝없이 절망하고, 분노하고, 난폭해졌다. 그때부터 눈물도 부쩍 흔해졌다.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어느 날 밤, 가슴이 터지고 머리가 빠개질 듯한 압박감에 방바닥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러다간 진짜로 미치고 말겠구나. 방바닥에 다시 엎어지자 목구멍에서 울음이 폭포처럼 터져 나왔다. 이불을 뒤집어쓴 채 한바탕 통곡을 토해내자 조금씩 숨이 쉬어졌다. 이때 자신도 모르게 어떤 기도가 터져 나왔다. “하느님, 제가 그날을 소설로 쓰겠습니다. 목숨을 바치라면 기꺼이 바치겠습니다. 저를 도와주십시오!”
1982년 봄, 소설가 임철우는 자신과 약속을 했다. 그것은 자신의 전 존재를 건 약속이고 기도였다. 닥치는 대로 자료를 모았다. 틈틈이 사람들의 얘기를 모으고, 메모하고, 신문과 잡지, 유인물 등 오월 광주에 관한 것이라면 걸신들린 사람처럼 그러모았다. 그럼에도 진상이 철저히 은폐, 왜곡되는 시대여서 자료와 정보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특히 계엄군 자료가 전무했다. 1988년 국회의 광주청문회를 기점으로 여러 해에 걸쳐 수사 자료집, 군 보고서, 군 작전일지 등이 나오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갔지만 오월 광주를 본격적으로 다룬 작품은 나오지 않았고, 정치적으로 대충 청산해버리자는 분위기로 흘러갔다. 더 이상 지켜보고 있을 수 없었다. 방대한 자료집 ‘광주민중항쟁 사료전집’ 속에 담긴 500여명의 증언과 그 외 자료에서 찾아낸 증언들을 포함해 700여명의 증언록을 바탕으로 다른 자료, 특히 ‘군 작전일지’ 등 여러 자료와 비교 대조를 통해 최대한 객관적 사실을 재구성, 재현하고자 시도했다.
소설가 임철우는 1980년 오월 광주의 열흘 낮과 밤의 진실을 핍진하게 그린 7500매 분량의 다섯 권짜리 대하소설 ‘봄날’(문학과지성사)을 1997년 발표했다. 광주에서 전당포 일을 했지만 그만둔 무석과 명치, 명기, 명옥의 아버지 원구의 고민으로 시작하는 소설은 5월18일부터 5월27일까지 오월 광주의 열흘 낮과 밤을 날짜별 시간대별로 따라간 다큐멘터리 형식을 취하면서 인물들과 그 인물의 마음을 따라간다.
시민들은 피와 희생을 통해 일시적으로 계엄군을 시 외곽으로 밀어내는 데 성공하지만, 결국 계엄군에 포위돼 고립된다. 연일 궐기대회를 열어서 결의를 다지지만 계엄군의 진압은 점점 임박해온다. 계엄군이 몰려오던 5월27일 새벽 전남도청에서 시민군 지도자 윤상현은 스스로에게 묻고 답한다.
“이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설사 이 순간엔 우리의 싸움이 패배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결코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일 뿐이야. 훗날 다른 누군가가 이 싸움을 다시 시작하겠지. 그래, 아무것도 헛된 것은 없어. 우리가 꿈꾸었던 것, 사랑하고 소망하고 투쟁했던 것, 진정 그 어떤 것도 헛된 것은 없어…”(‘봄날’, 제5권, 401쪽)
총체적이면서도 정확한 ‘봄날’은 오월 광주를 대표하는 증언 문학으로 자리매김해 왔다. 한국 작가로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도 대표작 ‘소년이 온다’를 집필하기 위해 증언록과 사진첩 등을 읽은 뒤 ‘봄날’을 읽었다고 밝힐 정도였다.
소설가 임철우는 왜 비상계엄에 맞섰던 오월 광주를 그려야만 했을까. 44년 만에 다시 비상계엄이 선포된 오늘의 한국 사회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그의 작가적 여로는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 임 작가를 지난 13일 제주 한라병원 옆 커피숍에서 만났다.
―대작이고 사안의 성격상 어려움이 적지 않았을 텐데. 무엇이 가장 어려웠는지.
“5월18일부터 21일까지 항쟁의 초반 사흘을 그려내는 일이 가장 어려웠다. 공수부대 출현을 기점으로 광주 전역이 순식간에 엄청난 소용돌이에 휩쓸리게 되는 사흘은 시민과 계엄군 간의 동시다발적 충돌로 아수라장이 된 상황이었다. 자료는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단편적이다. 항쟁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 위대함이 탄생하는 지점이기도 하고, 반대로 의심과 불신에 찬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이 사실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지점이기도 해서 무엇보다 정확해야 했다.”
―발표한 뒤 반응은 어떠했는지.
“‘봄날’ 5권이 완간된 직후 어느 저녁,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어야, 나 송기숙이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때까지 송 선생이 직접 저에게 전화를 해오신 건 처음이었다.… 어야, 철우. 자네가 참으로 큰일을 해냈네. 다른 무엇보다도 5월18일부터 20일까지 초반 사흘을 어떻게 이리 완벽하게 재현해 놓았는가. 실은 그동안 우리 연구소에서도 바로 그 부분을 제대로 정리해내려고 무진장 애를 써보다가 이제는 거의 포기하다시피 한 참인데, 그걸 자네가 혼자서 해냈구만 그래.… 감격했다. ‘봄날’을 쓰고 나서 받아본 것 중에서 최고의 칭찬이었다.”
―다시 비상계엄 사태로 큰 파문이 일고 있는데.
“계엄령이란 글자가 눈에 들어온 순간, 1980년 5월 그날이 뇌리에 겹쳐졌다. 무장한 군인들 앞을 막아선 시민들 모습이 화면에 비쳤을 땐, 울컥 눈물이 솟구쳤다. 부패한 권력의 총칼에 앞장서서 맞서는 건 언제나 평범한 시민들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떠올린 까닭이다. 최근의 모습과 1980년 광주의 다른 점 하나를 들어보라면 무엇보다 스마트폰이 아닐까. 1980년 그날 계엄군에 포위된 광주는 언론도 기자도 카메라도 존재하지 않는, 그래서 아예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도시였다. 장벽 저편에서 벌어지는 참상을 눈과 귀를 빼앗긴 국민들은 전혀 알 수 없었고, 그 이후로도 광주의 진실은 오랫동안 유언비어 취급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44년 뒤 국회 앞으로 달려온 시민들의 손에는 휴대전화가 존재했다. 이 현장의 시민들은 곧 수백 개의 언론사이자 수천 명의 기자였고 카메라였다. 전두환의 정치를 찬양하던 현직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그것을 국회가 해제하기까지의 과정은 실로 기적 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이것만은 잊어선 안 된다. 기적을 불러온 진짜 주인공은 휴대전화의 위력이 아니라, 목숨 걸고 그곳까지 달려 나와준 시민들의 정의로운 용기와 행동이었음을.”
1973년 시작된 대학 생활은 혼란스럽던 그의 삶을 바꿔놓았다. 가까운 친구들도 생기고, 무엇보다 다양한 문학 수업을 듣고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었다. 영미권의 고전과 현대 작품들을 접하게 되면서 시야도 넓어지고 다양한 소설 형식 기법도 알게 되었다. 따로 소설 지도를 받진 않았다. 혼자 간간이 습작해 단과대학 교지에 짧은 소설을 발표하기도 했다. 작가가 되겠다는 뜻을 가져본 것은 없었다.
하지만 1980년 오월 광주는 그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꿔버렸다. 많은 친구와 선후배가 죽은 오월 광주가 끝난 뒤, 두어 달 동안 남해안의 작은 섬에 숨어 지내다가 돌아와 4학년으로 복학했다. 이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아무 일도 하지 못한 채 살아남았다는 죄의식과 부끄러움을 견딜 수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글쓰기밖에 없었다. 소설을 통해서 오월 광주를 전하리라.
1954년 완도 평일도에서 태어난 임철우는 1981년 단편소설 ‘개 도둑’이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이후 장편소설 ‘붉은 산, 흰 새’, ‘그 섬에 가고 싶다’, ‘등대’, ‘봄날’(5권), ‘백년여관’ 등을, 소설집 ‘아버지의 땅’, ‘그리운 남쪽’, ‘달빛 밟기‘ 등을 발표했다. 이상문학상, 대산문학상, 요산문학상, 단재상 등을 수상했다.
―첫 소설집 ‘아버지의 땅’에 실린 단편 ‘사평역’은 곽재구의 시 ‘사평역에서’가 모티브로 알려져 있는데.
“무너지기 전 서울 마포 와우아파트에 자취할 무렵이었다. 어느 가을날 저녁, 옥상에서 마포를 내려다보았다. 불빛이 아름다웠는데, 갑자기 눈물이 터졌다. 그즈음에는 날마다 울며 시를 외우곤 했다. 곽재구의 시를 좋아했다. 시를 외우다가 어떤 그림이 그려지고 풍경이 보였다. 허름한 시골 간이역의 풍경에서 소설이 나왔다. 그냥 줄줄 나와서 일주일 만에 썼다.”
―특히 한강 작가가 중학교 때 ‘사평역’을 읽고 소설을 쓰고 싶다고 마음먹었다고 밝혀 화제가 됐다.
“독자 누군가에게 제 작품이 감동을 주었다면 작가로서야 반갑고 행복한 일이다. 예술가는 누구나 다른 예술가의 수많은 작품으로부터 자양분을 얻어 성장하고 또 서로 영감을 주고받는다. 저 또한 작가 한강의 여러 작품을 아끼고 사랑하는 독자이다.(그런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한 작가의 수상은 역시 같은 길을 가는 사람으로서 무척 반갑고 자랑스럽다. 최근 인터뷰에서 한 작가가 남긴 말이 기억에 남는다. 시상식을 앞두고 엄청난 부담감에 시달리다가 문득 ‘이 상은 내게 주는 게 아니라 문학에 주는 상’이라고 생각하자 마음이 훨씬 가벼워졌다는 얘기. 과연 철저한 장인정신을 지닌 작가답구나 싶어서 새삼 감탄했다.”
‘오월 광주에 관한 한, 시간 개념이 없다’는 그는, 인터뷰 도중 병이라고 스스로 자책하면서도 한두 번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무연한 듯 기다릴 뿐 대안이 없던 기자에게, 그 순간은 흑백필름 같은 어떤 순수나 본질로 돌아가는 시간이었다.
학교에서 퇴직한 임철우는 8년째 아내와 제주도에서 생활하고 있다. 되도록 얽매임 없이 느슨하고 느린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지낸다. 오전 8시쯤 일어나 아침을 먹고 마을 도서관이나 단골 카페에 가서 두어 시간 책을 읽거나, 아내와 함께 차를 타고 서귀포 시내로 나가서 장을 보거나 병원에 들렀다가 돌아온다. 점심 후엔 집에서 책을 읽고 텃밭과 마당의 풀을 뽑다가 오후 3시가 되면 개를 데리고 산책하러 나간다. 글쓰기는 주로 저녁 시간에. 자정을 넘기기 일쑤지만, 오래 몸에 밴 습관이라 어쩔 수 없다.
세상은 자주 폭력과 증오를 가르치려 하겠지만, 단순하고 명료한 일상 속을 살아가려는 소설가 임철우는 포기하지 않고 삶과 글로써 희망과 소망, 그리움을 오래 희망해 갈 것이다. 흰 갈매기의 날갯짓을 보든 희망을 품든 명기처럼. “그래, 절망하지 말자. 두려워하거나 증오하지도 말자. 이 추한 세상과 악과 폭력이 오직 절망과 증오만을 가르치려 할지라도, 나는 이제부터 희망을 배워 가리라. 인간과 삶을 향한, 가슴 벅찬 소망과 그리움의 노래를….”(‘봄날’, 제5권, 43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