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일한 현상에 대해서도 지식 영역에 따라 초점을 두는 부분이 다를 수 있다는 걸요.”(학생)
지난달 19일 대구 경북대사범대학부속고의 2학년 교실에선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한 학생이 생태학점 관점에서 본 포유류와 곤충의 죽음 차이를 이야기하자 또 다른 학생은 물리학자 슈뢰딩거와 철학자 에피쿠로스가 죽음에 주목한 방식의 차이를 이야기했다. 답을 들은 교사가 다시 질문을 던지면 학생들이 답을 받아치면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질답이 이어졌다. 학생들은 다소 난해할 수 있는 추상적인 질문에도 주저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모습이었다. 잠을 자거나 딴짓을 하는 학생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 수업은 국제 바칼로레아(International Baccalaureate·IB) 학급의 ‘지식이론’ 수업. 일반 고교 교육과정에 없는 과목으로, 학생들은 2년간 100시간에 걸쳐 정치·철학·종교 등 다양한 지식의 본질과 범위, 한계 등을 성찰한다. 질문과 토론이 많은 IB의 특징을 잘 보여줄 수 있는 과목이기도 하다. 학교 관계자는 “IB는 수업과 평가가 논술·구술 위주여서 끊임없이 말하고 쓰고 표현해야 한다. 교사는 정답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정답을 찾도록 돕는다”며 “교사와 학생이 함께 성장하는 수업”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은 세계적으로 교육열이 높고 청소년들의 학업성취도도 높은 나라로 꼽히지만, 동시에 입시 위주의 주입식·암기 교육 시스템이란 비판도 받고 있다. 교육 체계를 근본적으로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은 가운데 최근 그 대안으로 IB를 도입하는 학교가 늘고 있다. IB는 객관식 문제풀이가 아닌 논술과 토론 위주의 미래 교실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평가다.
◆주입식 탈피… 미래역량 기르는 IB
24일 대구시교육청에 따르면 IB는 스위스에 본부를 둔 비영리 교육재단 IBO(International Baccalaureate Organization)에서 개발·운영하는 국제인증 교육 프로그램이다. 창의력과 사고력, 문제해결능력을 기르는 데 중점을 둔 교수학습이 특징으로, 논술·서술·구술 평가와 토론식 수업 비중이 높고 과목도 국내 교육과정과 다르다. 올해 9월 기준 161개국 5790여개교에서 운영 중이다.
한국은 2018년 대구·제주를 시작으로 공교육에 도입됐고, 현재 11개 시·도 473개교에서 IB 학제를 운영하고 있다. 대구는 특히 가장 많은 ‘월드스쿨’을 보유한 지역이다. IB 학교는 준비단계인 ‘관심학교’와 인증에 필요한 교육활동을 하는 ‘후보학교’, IBO 인증을 받은 월드스쿨로 나뉘는데, 대구는 2021년 5개교(초 1·중 1·고 3개교)가 국내 최초로 월드스쿨 지위를 획득했다. 현재 IB를 도입한 98개교 중 26개교(초 10·중 11·고 5개교)가 월드스쿨이다.
국내 최초 월드스쿨 고교 중 하나인 경북대사대부고는 학년당 10개 학급 중 2개 학급을 IB 학급으로 운영한다. 현재 전교생 769명 중 116명이 IB 학급에서 공부하고 있다. 조종기 경북대사대부고 교장은 “미래사회가 요구하는 인재를 키우기 위해 새로운 교육이 필요하다. IB는 미래역량을 기르는 교육”이라고 강조했다.
실제 이날 참관한 수업들은 일반 고교 수업과는 매우 다른 분위기였다. 수업은 교사의 설명보다 학생의 토론·발표 위주로 진행됐다. 지식이론 수업에서 교사가 여러 지도를 보여주며 어떤 점을 발견했는지 얘기해보라고 하자 곧장 모둠별 토론이 시작됐다. 한 학생이 “만든 사람의 관점에 따라 어떤 것은 크게 그리는 등 지도가 달라진다”고 하니 다른 학생이 “권력과 연관됐다고 볼 수 있겠다”고 덧붙이는 등 모둠별로 함께 답을 만들어가는 모습이었다. ‘지식과 지도의 유사점’을 묻는 교사의 질문에 한 학생이 “최근 지도일수록 왜곡이 줄어든다. 지식도 더 확실하게 만들기 위해 수정하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하자 여기저기서 박수가 나오기도 했다.
일반고에 있는 과목도 수업은 다르게 진행된다. 예를 들어 국어 반어법의 경우 일반 교육과정에선 ‘어떤 것이 반어법인지 찾는 것’이 주요 과업이라면 IB 수업에선 ‘왜 반어법을 써야 하고, 어떤 효과를 볼 수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목표다. 수학도 문제풀이보다 미적분 등의 개념과 생활에서 어떻게 쓰이는지를 배우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한 2학년 학생은 “중학교 때는 시험을 목적으로 풀이 과정을 외웠는데 IB는 지식의 본질적인 의미를 더 깊게 탐구하게 된다”고 말했다.
IB 학급 학생들은 사교육도 거의 하지 않는다. 학교 관계자는 “IB 수업은 일반 사교육으로는 보충이 불가능하다. 학생들에게도 그냥 ‘학교 수업에 충실하면 된다’고 한다”고 말했다.
◆교사도 성장… “일반학교 선도 역할”
IB 수업은 교사에겐 까다로운 방식이기도 하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학생의 다양한 생각을 정교하게 다듬고 또 다른 질문을 던지는 것은 많은 에너지가 들어가는 일이다. IB 수업을 위해 연수도 받아야 한다. 경북대사대부고 관계자는 “IB 수업은 연구를 많이 해야 해 처음엔 교사들도 힘들어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IB 학급을 맡겠다는 교사가 늘었다고 한다. 경북대사대부고의 경우 교사의 80%가 IB 연수를 받았다. 학교 관계자는 “교사들이 자신도 아이들과 함께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이 교육이 왜 필요한지 느끼고 있다는 것”이라고 밝혔다.
실제 교사들은 “수업 준비에 품은 들지만 학생 참여도가 높아 수업이 재밌다”고 입을 모았다. 지식이론 류언아 교사는 “교육과정에 글로만 존재하던 ‘비판적 사고’가 실제 눈앞에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고, 내가 기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신난다”며 웃었다. 수학 권용민 교사는 “IB 학급은 일반 교실과 달리 아이들이 질문을 많이 해 내가 ‘필요한 존재’란 생각이 든다”며 “힘들지만 보람도 크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IB 확산에 대한 비판도 나온다. IB를 도입하려면 학교마다 연간 1000만원 이상의 연회비가 들어가 교육 예산이 해외로 유출된다는 것이다. IB 학교에만 자원이 쏠려 교육 불평등 문제를 발생시킨다는 지적도 있다.
대구시교육청은 IB에 투입되는 예산보다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유·무형 자산이 더 크고, IB 교육이 IB 학급 학생들만을 위한 것도 아니라는 입장이다. IB가 경직된 한국 공교육에 균열을 내는 자극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교육청 관계자는 “전국에서 많은 교사가 IB 수업을 보러 온다. 모두 IB를 도입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시도를 보러 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교육청은 IB를 운영하며 얻은 경험을 일반 학교로 확산해 공교육 전체의 질을 높인다는 방침이다. 강은희 대구시교육감은 “IB를 계기로 대한민국 교육이 어떻게 가야 할지 논의하고, 교육을 진화시킬 수 있다고 본다”고 강조했다.
교육부도 IB가 선도모델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교육부 관계자는 “IB 자체를 늘리기보다는 IB 우수 사례들이 일반 학교에도 확산되도록 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며 “IB 사례를 통해 일반 학교에서도 토론식 수업 등이 활성화될 수 있도록 지원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