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선 의원 출신 상도동계 원로인 김수한 전 국회의장이 30일 별세했다. 향년 96세.
경북 의성 출신인 고인은 1943년 대구고등보통학교(현 경북고) 3학년 재학 중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강제 퇴학을 당했고, 대구대(현 영남대) 법정학과 3학년 때 6·25를 맞아 좌익운동을 하던 친구들을 뿌리치고서 ‘멸공’이라는 혈서를 쓴 뒤 자원 입대했다고 언론에 회고한 바 있다.
1957년 민주혁신당 창당에 참여하며 정치권에 발을 디딘 김 전 의장은 민주당 정책위원장, 대일(對日)굴욕외교반대투쟁위원회 대변인, 신한당 대변인 등을 거쳐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소속으로 당선됐다. 이후 제8, 9, 10, 12, 15대 의원을 지냈다.15대 국회에서는 전반기(1996∼1998년) 국회의장을 맡았다.
고인은 신민당 대변인, 신한민주당 부총재, 통일민주당 중앙상무위원회 의장 등을 역임하며 민주화 과정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과 정치 역정을 함께했다. 4선 의원이던 1980년에는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에 강제 연행돼 한 달여간 불법 구금됐다. 당시 신군부의 강압으로 의원직을 사퇴하고 아내 재산까지 헌납한 뒤에야 석방된 고인은 올 3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로부터 인권 침해 피해자로 인정 받았다.
2015년 김 전 대통령 국가장에서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어 있던 겨울공화국 치하에서 조국 땅, 역사의 현장을 지키며 생명을 던져 처절하게 저항하는 대통령님의 모습은 모든 민주세력들에게 무한한 감동과 용기의 원천이 되었다”는 내용의 추도사를 낭독하며 울먹이기도 했다.
‘야당은 김수한의 입으로 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명대변인으로 통했던 그는 법안 편법 처리를 일컫는 ‘날치기’라는 말을 처음 쓴 것으로도 잘 알려졌다.
김 전 의장은 한일의원연맹 부회장, 한일친선협회중앙회장 등을 지내며 한·일 의회 및 민간 외교 분야에 크게 공헌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유족으로는 아들인 김성동 전 의원 등이 있다. 빈소는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고, 발인은 2025년 1월 3일이다. 장지는 대전국립현충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