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靑春) 영화’라는 장르가 명확하게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성인으로 이행해 가는 시기의 쓰라린 경험을 그리는 일군의 일본·대만 영화들을 만날 때면 ‘틴에이저 무비’로 번역되지 않는 동북아시아만의 영화 계보가 있다고 주장하고 싶다. 검정·군청 교복 재킷이나 세일러복, 하얀 셔츠를 입은 청춘들. 모순이 피어오르고, 소망은 금지당하고, 우정엔 금이 가고, 싸움이 벌어지고, 그런 다음 교복을 벗으며 엔딩을 맞는다. 이미 다 아는 얘기라고? 근미래 일본 도쿄를 배경으로 고교 졸업을 앞둔 10대들의 이야기를 그린 네오 소라 감독의 수작 ‘해피엔드’(30일 개봉)를 방심한 채 보기 시작한다면, 일격을 당하게 될 것이다.
◆권위주의 日사회 묘사한 SF 상상력
영화는 서늘한 예언을 담은 자막으로 시작한다. “낡은 틀에 사람을 가두는 세력이 술렁인다. 풍화된 건물이 평소보다 더 삐걱댄다. 사람들을 구분 짓는 체계가 붕괴 중인 일본에서 뭔가 크게 달라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SF 상상력으로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지진 발생에 대한 전방위적 공포가 만들어낸 파시즘이다. 불안은 자유를 억압하고 공권력 남용을 정당화하는 구실로 쓰인다. 시시때때로 지진 경보가 울리고, 정권은 ‘비상사태’라는 수사를 억압적 통치의 명분으로 활용한다. 그러나 실상 공권력이 보호하는 건 시민이 아닌 정권일 따름이다. 산발적으로 반정부 시위가 일지만 경시청은 시민들의 목소리를 ‘폭동’으로 규정하고 단속을 강화한다.
둘도 없는 소꿉친구인 ‘유타’(구리하라 하야토)와 ‘코우’(히다카 유키토)는 이렇듯 폐쇄적인 사회를 살면서도 장난과 음악에만 몰두하는 쾌활한 청춘들이다. 어느 밤, 교내 동아리실에 몰래 잠입해 음악을 틀고 놀던 이들은 장난기가 발동한 나머지 교장선생이 막 뽑은 고급차에 돌이킬 수 없는 장난질을 친다. 격분한 교장은 교내에 24시간 학생을 감시하고 규정에 따라 벌점을 부여하는 인공지능(AI) 기술 ‘판옵티’(panopty)를 도입한다.
교내 감시 체제는 코우로 하여금 그간 축적한 정체성 고민과 사회문제에 대해 숙고하게 하는 기폭제로 작용한다. 반면 유타는 여태까지와 마찬가지로 친구들과 장난치고 음악 들으며 즐겁게 살아가기만을 원한다. 코우는 유타의 어린애 같은 태도에 짜증을 느끼고, 시위에 나서는 급진적 친구 후미(이노리 기라라)에게 이끌린다. 굳건했던 유타와 코우의 우정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재일(在日)이라는 정체성
세계 어느 국가보다 한국 관객은 유독 자세를 고쳐 앉으며 진지하게 이 영화를 보게 될 것이다. 12·3 비상계엄 선포의 악몽 때문이기도 하지만, 코우가 정치적 주체로 눈뜨는 배경에 재일(在日) 한국인이라는 피차별자로서의 경험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부유한 집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큰 유타와 달리 코우는 숨쉬듯 차별의 감각을 느낀다. 둘이 함께 길을 걷다 경찰에 검문을 당해도, 자이니치 4세인 코우만 ‘특별 영주증명서’를 소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수모를 당한다.
영화는 자이니치 문제를 건드릴 뿐 아니라 반(反)이민 정서가 극대화한 근미래 일본 사회를 세밀하게 묘사한다. 고교 한 학급에서 일본 국적이 아닌 학생이 10명에 달하고, 흑인이나 백인의 외양을 한 학생이 흔할 만큼 이민이 보편화되어 있지만 정권은 외국인 혐오를 부채질한다.
코우가 부지불식간에 정체성을 자각한 주체로 거듭나며 유타와 소원해지는 모습은 이보다 더 탁월할 수 없을 만큼 촬영됐다. 유타와 코우의 소중한 친구 톰을 떠나보내는 이별파티가 파한 후 부엌 한 구석에서 코우는 톰에게 나지막히 말한다. “만약 대학 같은 데서 유타와 처음 만났다면 우린 친구가 됐을까? 녀석은 어릴 때랑 똑같아.” 유타는 남몰래 대화를 듣고 있다. 열아홉, 잔치는 끝났다. 젊음의 동력만으로 웃으며 함께일 수 있는 시기는 이미 가버렸는지도 모른다. 유타의 얼굴 위엔 이미 끝나버린 파티에서 형형했던 미러볼의 그림자가 비춘다.
◆신인감독·배우 합세해 만든 기이한 활력
네오 소라는 영화의 주인공인 음악동아리 멤버 5명 중 ‘아타’(하야시 유타)를 제외하고는 한 번도 연기를 한 적 없는 배우를 기용했다. 신인 배우들이 발산하는 에너지는 놀라운 케미스트리를 만들었고, 특히 유타 역의 구리하라 하야토와 코우 역의 히다카 유키토는 명징하게 스타 탄생을 예고한다.
34세 감독 네오 소라 역시 이 영화로 장편 극영화 연출에 데뷔한 신인이다. 2023년 작고한 일본의 거장 음악가 류이치 사카모토의 아들인 그는 아버지의 말년을 간결하면서도 아름답게 연출한 다큐멘터리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로 2023년, 이듬해에는 이 영화 ‘해피엔드’로 베니스국제영화제에 초대됐다. 지난해 베니스영화제에서 그는 팔레스타인 해방을 촉구하는 의상을 착용하고 레드카펫에 섰다. 전공투 일원이던 사카모토의 아들다운 행보라고 보아야 할까. 네오 소라와 두 주연 구리하라 하야토, 히다카 유키토는 24일 내한해 한국 관객을 만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