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공화국 초반인 1983년 2월의 일이다.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운 조지 슐츠 국무부 장관이 취임 후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다. 그로부터 2개월 뒤인 1983년 4월에는 이범석 외무부(현 외교부) 장관이 답방 형식으로 미국에 갔다. 당시 이 장관이 워싱턴에서 미국 조야 인사들을 상대로 행한 연설이 흥미롭다. “전두환 대통령에게 워싱턴에 다녀와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전 대통령께서 ‘슐츠 장관이 서울을 다녀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무슨 일로 또 미국에 가려느냐’고 물으셨습니다.” 한국의 경제력이나 국제적 위상이 지금과 비교도 안 되던 시절이다. 전 대통령 얘기는 ‘장관의 해외 출장에 드는 경비가 얼마인데, 외화를 아껴 써야 하지 않느냐’는 지적이었을 것이다.
그러자 이 장관은 “미국인은 부부 사이라도 서로 ‘아이 러브 유’(I love you)라는 말로 날마다 사랑을 확인한다”라는 비유를 들어 전 대통령을 설득했다. “국가 간에도 애정을 표현하며 지내야 한다”는 이 장관의 주장에 전 대통령은 의구심을 풀고 그의 방미를 흔쾌히 승낙했다. 이런 재미난 에피소드를 들려준 뒤 미국 유력 인사들에게 “한국 국민은 미국과 여러분을 사랑한다”고 외친 이 장관을 향해 청중은 열띤 박수와 환호로 호응했다. 낯선 상대방의 마음을 열고 호감을 이끌어내는 것이 바로 외교의 본질이란 점을 제대로 보여준 장면이 아닐까 싶다. 외교장관과 대사, 총영사는 물론 일선 외교관까지 유념해야 할 덕목이라고 하겠다.
최근 미국 조지아주(州)의 한국 공장에서 일하는 우리 국민 300여명이 불법 체류 등 혐의로 미 이민 당국에 체포 및 구금되는 일이 벌어졌다. 한국과 미국은 서로 동맹이고 미국인들의 일자리 창출을 위해 국내 대기업이 큰마음 먹고 투자를 한 것인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 하며 충격과 배신감을 토로하는 이가 많다. 일각에선 이재명정부 들어 미국 내 주요 재외 공관장들이 후임자 없이 본국으로 소환되거나 물러난 점을 문제로 지적한다. 당장 국무부 등 미 연방정부를 상대하는 워싱턴 주미 대사와 조지아주를 관할하는 주애틀랜타 총영사가 모두 공석이다. ‘재외 국민 보호’라고 하는 외교부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 일선에서 실행에 옮겨지지 어려운 여건인 셈이다.
결국 조현 외교부 장관이 체포 및 구금된 우리 국민 석방을 위해 8일 황급히 미국으로 떠났다. 명색이 ‘주요 7개국(G7)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나라’의 외교 수장이 워싱턴으로 가는 직항을 못 구해 경유편을 타고 출국했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지난 7월21일 취임한 조 장관으로선 이날까지 약 50일의 짧은 기간 동안 벌써 세 번째 미국 출장이다. 주미 대사관에 노련한 대사, 아니 든든한 ‘미국통(通)’ 중견 외교관이라도 한 명 있었으면 이런 호들갑을 떨 필요가 있었을까. 이재명 대통령에 의해 외교장관 후보자로 지명된 직후 “(외교장관이) 취임하면 미국부터 가야 한다는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짐짓 여유를 부렸던 조 장관의 지금 심경은 어떨지 궁금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