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 배우이자 제14대 국회의원을 지낸 이순재가 25일 새벽 세상을 떠났다. 향년 90세.
유족 측은 이날 “그동안 지병을 앓아왔으며 가족들이 임종을 지켰다”고 전하며 깊은 애도 속에 장례 절차를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함북 회령에서 서울 무대로…철학도가 탤런트가 되기까지
1934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난 이순재는 해방과 전쟁의 격동기를 지나 서울로 내려왔다.
서울고와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한 그는 학문적 길보다 예술적 열망을 선택했고, 1960년 KBS 1기 탤런트로 연기 인생을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전문 연기 교육 시스템이 거의 없던 시대. 이순재는 연극·라디오·TV를 넘나들며 특유의 정확한 발성, 치밀한 분석 연기로 ‘엘리트 연기자’라는 새로운 이미지를 구축했다.
그는 이후 작품의 시대를 관통하며 국내 최고령 현역 배우라는 타이틀을 지켜냈다.
◆방송연기자협회 세 번의 회장…업계 대표에서 정치무대까지
이순재의 길은 단순한 ‘배우 이력’에 그치지 않는다.
1970~1980년대 한국방송연기자협회 회장을 세 차례 역임하며 후배 양성과 방송 환경 개선에 힘을 쏟았다.
1992년 제14대 총선에서는 당시 여당인 민자당 후보로 서울 중랑갑에 출마해 당선, 예술인 출신 국회의원이라는 새로운 경로를 열었다.
국회에서도 부대변인, 한일의원연맹 간사 등 역할을 맡으며 문화·외교 분야 의정 활동에 주력했다.
◆‘평생 현역’이 멈춘 순간…최근 이어진 건강 이상설
고령임에도 무대와 카메라 앞을 떠나지 않았던 그는 지난해 말부터 건강 이상설에 휘말렸다.
2023년 10월 예정돼 있던 공연을 취소한 데 이어, 올해 4월 한국PD대상 시상식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다.
특히 예능 ‘꽃보다 할배’에서 인연을 맺은 배우 박근형이 지난 8월 간담회에서 “상태가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밝히면서 우려는 더욱 짙어졌다.
팬들은 “평생 현역이던 그가 휴식을 택했다”며 급격한 건강 악화 가능성을 걱정해 왔다.
◆한국 연기계의 ‘기둥’이 남긴 유산
이순재는 생전 “연기는 죽을 때까지 한다”며 ‘직업인으로서의 책임’을 강조했다.
실제로 그의 이름은 한국 드라마·연극사 곳곳에 각인돼 있다. 시대극에서 가족 드라마, 예능까지 세대를 아우르는 존재감을 보이며 한국 대중문화 속 한 축을 이루었다.
정치와 문화 두 영역을 모두 경험한 그는 “배우는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말을 자주 남겼다.
그의 90년 인생은 바로 그 신념을 증명하는 여정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