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 카타르 월드컵 때의 일이다. 토너먼트 16강전에서 네덜란드가 미국을 3-1로 격파하고 8강에 안착한 직후 당시 마르크 뤼터 네덜란드 총리(현 나토 사무총장)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에게 ‘이겨서 미안하다’는 취지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메시지를 날렸다. 뤼터는 SNS 글에 “풋볼(football)이 이겼어요”라고 적었는데, 이는 축구를 풋볼 대신 ‘사커’(soccer)라고 부르는 미국을 조롱한 것으로 풀이됐다. 오늘날 미국에서 풋볼은 럭비 종목과 흡사한 아메리칸풋볼, 이른바 ‘미식축구’를 가리키는 용어로 널리 쓰인다.
한국을 대표하는 축구 선수 손흥민(33)은 현재 미국 프로축구 리그(MLS)의 로스앤젤레스(LA) FC에서 선수로 뛰고 있다. 미국으로 옮기기 직전까지 영국 프로축구 프리미어리그(EPL)에서 활동한 손흥민은 지난 8월 6일 이적을 알리는 기자회견 도중 “(축구를) 풋볼이라고 해야 할지, 사커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웃었다. 영국에 있는 동안 줄곧 풋볼이라고 부르다가 갑자기 사커란 단어를 쓰자니 꽤 쑥스러웠을 것이다. 한국은 미국식 영어가 대세로 통하는 나라이지만 대한축구협회(KFA)는 영문 이니셜에 S(사커)가 아닌 F(풋볼)을 사용한다.
풋볼과 사커 둘 다 영국에서 만들어진 말이다. 19세기 영국에선 경기 도중 손으로 공을 만질 수 있는 ‘럭비 축구’(럭비)와 오직 발만 사용이 가능한 ‘협회 축구’(사커)가 나란히 공존했다. 그러다가 럭비 축구는 말 그대로 ‘럭비’, 협회 축구는 ‘풋볼’로 부르는 관행이 정착하며 사커는 퇴출되고 말았다. 그런데 한때 영국 식민지였던 영어권 국가들 가운데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에서는 사커란 어휘가 뿌리를 내렸다. 다만 야구, 농구, 아이스하키와 더불어 미식축구(풋볼)가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미국에서 사커는 풋볼을 밀어낼 수 없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5일 수도 워싱턴에서 열린 ‘2026 북중미 월드컵’ 조 추첨식에서 ‘미국도 축구를 사커 말고 풋볼로 불러야 한다’는 취지의 주장을 펴 눈길을 끈다. 이날 국제축구연맹(FIFA·피파)이 제정한 ‘피파 평화상’의 초대 수상자가 된 트럼프는 사커에 관해 언급하며 “생각해보면 이 종목(축구)을 풋볼로 부르고, 아메리칸풋볼(미식축구)은 다른 이름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에 축구 붐을 일으키는 게 소원인 피파의 숙원에 부응하는 발언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이 트럼프가 피파 평화상을 받은 진짜 이유인지 모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