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칠순 즈음 펴낸 백범일지에 마지막 소원으로 조국이 오직 문화의 힘으로 세계에 우뚝 서기를 희망했다. 머나먼 미래 조국이 군사·경제의 힘보다 세계에 모범이 되는 문화 강국으로 인류 행복에 기여하는 국가여야 한다고 내다본 것이다. 광복 80주년을 맞은 오늘날 대한민국은 백범이 바라던 문화 강국 반열에 성큼 올라선 모습이다. 젊은 작가 한강은 한국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거머쥐었고,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은 오스카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비롯한 4개의 상을 휩쓸었다. 정명훈·조성진·임윤찬 등 한국 클래식 음악인들은 세계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으며, 방탄소년단(BTS)과 블랙핑크의 활약으로 K팝은 세계 대중문화의 주류로 자리 잡았다.
◆영화·드라마·뮤지컬 휩쓰는 ‘K콘텐츠’
한국영화의 역사는 1919년 10월 27일, 서울 종로 단성사 스크린에 김도산의 ‘의리적 구토’가 빛을 쏘아 올린 순간 시작됐다. 일제 치하에서도 1926년 나운규의 ‘아리랑’은 민족의 울분을 예술로 승화시켰고, 1935년 첫 발성영화 ‘춘향전’으로 기술적 진화를 이뤄나갔다.
광복 이후 1960년대부터는 해외에서 차츰 그 성과를 인정받기 시작했다. 강대진 감독의 ‘마부’(1961)가 베를린영화제 은곰 특별상을 수상하며 한국영화의 잠재력을 널리 알렸고, 1987년 고(故) 강수연이 ‘씨받이’(감독 임권택)로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을 거머쥐며 한국 배우의 존재감을 세계에 각인시켰다.
1990년대 이후 한국영화는 대중화에 성공하며 영향력을 확대했다. 1993년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가 서울 관객 100만명을 최초로 돌파했고, 1996년 출범한 부산국제영화제는 아시아 영화의 허브로 자리 잡았다. 2003년 개봉한 강우석 감독의 ‘실미도’는 1000만 관객 시대의 포문을 열었고, 이듬해 박찬욱 감독은 ‘올드보이’로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받으며 한국영화의 미학을 세계에 각인시켰다. 2007년에는 전도연이 ‘밀양’(감독 이창동)으로 칸 여우주연상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2019년에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거머쥐며 ‘한국영화 100년’의 결산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이듬해 ‘기생충’의 오스카 4관왕, 2021년 윤여정의 ‘미나리’(감독 정이삭)로 이어진 오스카 수상(여우조연상)은 한국영화의 위상을 세계의 중심으로 끌어올렸다. 영화로 시작된 ‘K콘텐츠’ 인기는 이후 넷플릭스 오리지널시리즈 ‘오징어게임’이 ‘방송계의 아카데미’라 불리는 에미상 6관왕에 오르고, 뮤지컬 ‘어쩌다 해피엔딩’이 ‘토니어워즈’ 6관왕을 차지하며 ‘K콘텐츠 전성시대’로 연결됐다.
◆세계 정상에 오른 K팝
사실 한국의 문화에 ‘K’를 붙이는 선봉에는 대중음악이 있었다.
K팝은 처음부터 내수 시장에만 머물 생각이 없었다. 2000년대 초 보아가 일본 오리콘 차트를 휩쓴 뒤, 동방신기·슈퍼주니어·카라 등이 아시아 전역을 돌며 한류 콘서트의 원형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K팝은 ‘영미권 장벽’ 앞에서 맴도는 동아시아의 신흥 음악에 가까웠다. 방송과 음반 유통 구조가 강력했던 시대, 미국·유럽 시장은 범접할 수 없는 또 다른 세계였다.
상황을 뒤집은 건 디지털이었다. 유튜브와 소셜미디어 시대가 열리면서 대중음악의 국경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은 전 세계인을 ‘말춤’으로 대동단결시키며 K팝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이후 강력한 팬덤을 기반으로 성장한 방탄소년단(BTS)은 사회적 메시지와 서사를 결합해 ‘변방에서 온 아티스트’가 아닌 세계 팝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전례를 만들었다. 여기에 올해 전 세계를 휩쓴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K팝의 위상을 한 단계 더 비틀어 올려놓았다. 미국 제작사가 만든 가상의 K팝 그룹은 K팝이 이미 국적을 초월해 세계 문화산업의 장르로 자리매김했음을 증명했다.
지난달 7일(현지시간) 미국 대중음악계 최고 권위를 지닌 그래미 시상식 주요 부문 후보에 K팝 장르가 대거 지명됐다는 소식은 K팝이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세계 대중문화의 언어가 됐음을 보여준다.
◆노벨문학상 배출한 한국 문학
한국문학 역시 요즘 해외 출판 시장에서 어느 때보다 뜨겁다. 4~5년 전부터 김호연의 장편소설 ‘불편한 편의점’을 비롯해 이른바 ‘힐링소설’이 큰 인기를 끌었는데, 지난해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면서 한 단계 더 도약했다. 2010년 출간된 여성 액션물인 강지영 작가의 ‘심여사는 킬러’가 지난해 영국 대형 출판사인 노프 더블데이에 2억원대의 선인세를 받는 조건으로 판권이 팔리기도 했다.
최근 한국문학 작품에 대한 해외 출판사들의 러브콜이 이어지면서 1억원이 넘는 선인세 계약이 잇따르고 있다. 분야도 힐링소설을 넘어서 장르 소설, 순문학, 에세이를 가리지 않고 확산 추세다.
◆K클래식, 1967 정경화부터 2022 임윤찬까지
K클래식의 기원은 정경화(바이올린), 정명화(첼로), 정명훈(피아노) 남매의 ‘정 트리오’에서 시작된다. 1967년, 정경화가 미국 레벤트리트 국제콩쿠르에서 공동 1위를 차지하며 한국 음악사의 새 장을 열었다. 1971년 정명화는 제네바 국제콩쿠르 1위를, 1974년 정명훈은 차이콥스키 국제콩쿠르 피아노 부문 공동 2위를 기록했다. 전후 재건된 한국 문화계가 배출한 첫 세계적 클래식 연주자였다. 이후 백건우, 백혜선, 장한나 등이 국제무대에서 한국 클래식의 이름을 높였다.
K클래식을 한 차원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린 건 2015년 쇼팽 국제피아노콩쿠르에서 우승한 조성진이다. 이후 임윤찬이 2022년 반 클라이번 콩쿠르 최연소 우승 후 독창적 음악세계로 세계인의 주목을 받고 있다.
현재 세계 주요 콩쿠르 본선의 절반 가까이에 한국인 연주자가 포함될 만큼 K클래식이 축적한 역량은 눈부시다. 최근 마에스트로 정명훈이 오페라의 성지 이탈리아 라 스칼라 극장의 차기 음악감독으로 선임되면서 한국 클래식은 본고장 유럽에서도 실력을 인정받는 단계에 이르렀다.
◆K컬처의 과제
1960년대 영국의 록·팝 문화나 1980∼90년대 일본 애니메이션·만화 열풍 등 특정한 문화가 일시적으로 세계적 유행을 탄 경우는 적지 않다. 그러나 한류처럼 문화 전방위에서 특정 국가 문화가 영향력을 행사한 사례는 드물다.
새로운 과제는 한류의 지속가능한 발전이다. 국가 문화 저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한류 역시 일시적 유행에 머물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은 한국문학이 세계문학으로 가는 입구에 들어서 있다고 진단한다. 다만 한국문학이 세계문학의 일원으로 확고히 자리 잡기 위해선 다채로우면서도 수준 높은 작품이 꾸준히 이어져야 한다는 지적이다. 시인인 곽효환 전 한국문학번역원장은 세계일보와의 전화 통화에서 “지난해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한국문학이 통과해야 할 중요한 관문을 지났을 뿐”이라며 “한국문학이 세계문학의 일원으로 확고히 자리 잡기 위해선 앞으로 10~20년 길게 보고 지금의 수용자 중심 한국문학 번역출판 지원을 가속화하면서 한편, 한국의 역사와 문화 및 문학사적 관점에서 중요한 한국문학의 정수를 세계문학의 장 안으로 진입시키는 ‘세계문학으로서의 한국문학’을 정립하는 기획이 절실하다”고 역설했다.
K클래식의 경우도 국내 음대에선 이미 국내 전공자 감소로 생긴 공백을 외국인 유학생이 채우는 국면이다. 한 국립대 음대 교수는 “일부 음대의 경우 절반 정도가 외국인 유학생으로 채워진 상황”이라며 “중국에서 온 유학생이 많은데 전공을 열심히 공부하는 게 아니라 귀국해서 교수 자리를 얻기 위한 학위 자체가 목적인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문제”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