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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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시선] 비핵화 실종 시대, 남북대화 해법 찾자

입력 : 2025-12-09 23:29:27
수정 : 2025-12-09 23:2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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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움직이게 하려면 상상력의 전환 필요
일상 속 위기관리… 남북관계 접근법 바꿔야

북한이 스스로를 ‘적대적 두 국가’의 한 축으로 못 박았다. 이제 남북관계는 우리가 알던 과거의 특수관계가 아니다. “언제든 교전이 가능한 두 적대국”이라는 서늘하고도 낯선 문법이 한반도를 지배하고 있다. 세계도 변했다. 미국과 중국은 ‘한반도 비핵화’라는 의제를 조용히 내려놓았다. 러시아는 사실상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대우하며 전략적 밀월을 즐기고 있다. 냉정하게 말해 ‘비핵화’ 구호를 가장 신실하게 외치는 나라는 어쩌면 한국뿐이다.

이제 우리는 고립된 당위론을 넘어 북한을 대화 테이블로 불러낼 현실적 해법이 무엇인지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면서도 북한을 움직이게 하려면 기존의 관성을 타파하는 세 가지 대담한 상상력의 전환이 필요하다.

김동엽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첫 번째는 안보 패러다임을 ‘핵 안보’에서 ‘일상의 위기관리’로 전환하는 것이다. 지금 한반도 위기의 본질은 북한의 핵무기보다 우발적 충돌을 제어할 안전장치가 전무하다는 구조적 불안정성에 있다. 과거에는 핫라인이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남북 간 통신선이 모두 끊겨 단 한 번의 실수가 전쟁으로까지 비화될 수 있는 인화성 높은 환경이다. 비핵화 로드맵보다 남북 군사 통신선을 복원하고 우발충돌 방지 군사회담을 상시화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싸워서 이기는 것보다 싸울 필요가 없는 상태를 만드는 것, 국민의 일상에서 공포를 걷어내는 것이야말로 남북 모두에게 최고의 선택이자 가장 확실한 안보 전략이다.

이런 점에서 최근 북한이 군사분계선을 따라 거대한 방벽을 세우고 있어 우려스럽다. 이미 80% 이상 구축된 새로운 방벽이 완성되고 북한이 이를 헌법에 남북 간 국경선으로 명시하는 순간, 정전협정이 규정한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DMZ)라는 완충지대는 사실상 소멸한다. 정전협정이라는 마지막 물리적 안전핀마저 뽑히는 것이다.

이러한 우려로 인해 두 번째 상상력의 전환을 필요로 한다. 바로 북한이 내세우고 있는 적대적 두 국가관계를 역이용해 그들의 불안감을 제거하는 것이다. 북한은 이미 ‘민족’ 담론을 접고 ‘적대적인 두 국가’ 노선을 공식화했다. 우리가 여기에 직접 맞대응할 필요는 없지만, 여전히 ‘민족’ 프레임만 붙들고 있을 수도 없다. 오히려 “좋다, 그렇다면 철저히 국가로서 국경 관리와 상호 불가침을 논의하자”고 접근하는 것이다. 특수관계가 아닌 상대를 인정하고 흡수통일할 생각이 없다는 원칙하에 국가 간의 외교적 문법으로 접근할 때 북한에 대화에 응할 명분을 줄 수 있다. 이는 민족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의 생존을 위해 형식을 파괴하는 실용주의다. 법적·헌법적 원칙을 유지하되, 실질적 정책에서는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두 체제”로 다루는 현실적 선택지이다.

 

물론 우리가 핵을 이야기하지 않고 국가 대 국가로 대화하자고 해도 북한이 선뜻 대화의 테이블에 나올 가능성은 높지 않다. 그렇다고 어차피 북이 호응하지 않을 것이라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수는 없다. 그러면 그럴수록 쫓아가서 더 두드려야 한다. 끊임없이 선의를 전달해 바늘구멍이라도 뚫어야 한다. 비록 지금은 대화와 협력이 단절되어 있지만 진정성을 가지고 먼저 손을 내밀어 인내심 있게 노력을 다해 나가면 북측의 태도 역시 변할 수 있다.

그래서 필요한 세 번째 상상력의 전환은 남북관계 접근법의 대전환이다. ‘수동적 상호주의’를 버리고 ‘탈(脫)상호주의적 선제 조치’를 통해 국면을 주도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경제 10위권, 군사력 5위권의 작지만 큰 나라이다. 상대가 움직여야 나도 움직인다는 수동적 태도는 약자의 것이다. 우리가 주도하는 선제적 긴장 완화 조치는 양보가 아니라, 한반도 정세를 우리가 관리하겠다는 자신감의 표현이자 가장 적극적인 안보 전략이다. 대화 없이도 충돌을 막고, 협상 없이도 위기를 통제하는 ‘관리형 전략적 평화’ 시스템을 우리가 먼저 가동해야 한다. 그 출발점이 바로 9·19 군사합의의 복원이자 재설계일 것이다.

평화는 구호나 선언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치열한 관리와 구조적 설계를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상대를 굴복시키려는 승리의 전략이 아니다. 전쟁을 막고 평화 공존을 모색하는 생존의 전략이자 공동 성장을 위한 미래의 전략이어야 한다.

 

김동엽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