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지주사 규제특례를 마련하는 등 ‘금산분리’(금융과 산업의 분리)에 예외적 완화에 나서면서 대한민국 산업과 금융을 규제해온 금산분리의 대원칙이 인공지능(AI)과 반도체 산업이라는 ‘미래먹거리’ 앞에 43년 만에 변곡점을 맞이했다. 일각에선 SK하이닉스 등 일부 반도체 기업을 위한 맞춤형 규제 완화라는 비판도 나온다.
11일 기획재정부의 업무보고에서 공개된 지주사 규제특례는 AI와 반도체 산업 등을 육성하기 위한 규제 완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대규모 자금이 투입되는 반도체 공장 증설 및 설비 투자를 위해 금융리스업 목적의 특수목적법인(SPC)을 만들고, 외부자본을 유치하기 위한 필수적인 규제 완화라는 평가다.
금산분리는 금융과 산업의 결합에 따른 금융 고객과 산업자본 간 이해 상충 가능성, 경제력 및 금융의 집중화, 금융회사의 건전성 훼손 가능성 등의 문제점을 방지하기 위해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이 상대 업종을 소유?지배하는 것을 금지하는 원칙이다. 삼성·SK·현대자동차 등 산업자본이 은행이나 자산운용사 등 금융회사를 경영하지 못하도록 하고, 거꾸로 금융자본이 산업자본을 소유 및 지배하는 것도 금지한다.
우리나라에선 1982년 동일인의 의결권 있는 은행 주식 8%(현재 10%) 초과 소유 및 사실상의 지배를 금지한 은행법 개정을 통해 금산분리가 제도화됐다. 이후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공정거래법)과 ‘금융지주회사법’, ‘보험업법’, ‘금융산업의 구조개선에 관한 법률’ 등에서 금산분리 관련 규제를 구체화하고 있다. 특히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재벌과 금융기관 간 불투명한 거래 구조, 계열사 간 자금 지원이 외환위기의 원인으로 지목되면서 금산분리에 대한 관심과 목소리가 높아졌다. 현행법상 금융지주회사는 일반 회사의 주식을 5% 이상 보유할 수 없고, 금융 사업에 주력하지 않는 산업자본은 의결권 있는 은행 주식을 4%(지방은행은 15%) 이상 보유할 수 없다.
정부가 금산분리를 규정하는 공정거래법을 직접 건들지 않고 국가첨단전략산업에 반도체 업종을 추가하는 방식으로 특례규정을 마련한 것은 사실상 금산분리 규제를 완화하면서도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금융당국의 한 관계자는 “금산분리라는 대원칙을 훼손했다기보단 필요에 따른 최소한의 특례규정을 만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며 “금융과 산업 간의 소유를 금지하는 금산분리의 원칙은 향후에도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금산분리 규제가 가장 강한 나라로 알려져 있다. 반면 유럽연합(EU) 국가 대부분은 금산분리 규제가 없다.
다만 이번 규제 완화가 사실상 SK하이닉스에 국한돼 적용된다는 점에선 특혜라는 비판도 나온다. 최대수혜자로 평가받는 SK그룹의 최태원 회장은 “단일 기업이 천문학적인 투자를 감당하기 어려운 만큼 외부자금을 유연하게 유치할 수 있게 해달라”며 규제 재검토 필요성을 재차 강조해 왔다. 또 지주회사 체제에서 손자회사 구조로 반도체 사업을 영위하는 대기업은 SK를 제외하곤 거의 없는 상황이다. SK그룹이 금융당국 인가를 받아 손자회사가 금융사 라이선스를 갖게 되면 신용도가 올라 대출 금리도 낮출 수 있고, 세제 혜택도 예상된다. 금융리스는 금융 서비스로 간주돼 부가가치세 면제 적용을 받을 수 있다.
예외적인 금산분리 원칙의 규제완화이긴 하지만 금산분리의 취지에 비춰 이번 규제 완화에 반대하는 의견도 적지 않다. 양준석 카톨릭대 교수(경제학)는 “한국은 기업집단 내 경영이 밀착된 ‘재벌’이 있어 금산분리를 추진할 경우 다른 국가에 비해 더 큰 부작용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며 “재벌이 금융사를 소유해 금융사를 통해 모회사뿐 아니라 자회사나 손자회사까지 자금을 조달하는 데 활용될 경우 자칫 예금주들에게 문제가 발생할 수 있고, 과거 외환위기 사태를 초래한 종합금융회사 문제도 이런 문제점이 촉발된 대표적 사례”라고 지적했다.
안동현 서울대 교수(경제학부)는 “기업이 투자할 수 있도록 제약 요건을 풀어주는 것은 시대적 상황을 고려할 때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면서도 “정부가 규제를 풀어주더라도 ‘규제 차익’을 노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기업들이 제도를 악용하는 행태를 보인다면 그때 다시 규제를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