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산 K-2 전차의 두번째 해외 수출이자 첫 중남미 진출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현대로템은 지난 9일(현지시간) 페루 리마에서 페루 육군 및 페루 육군 조병창(FAME S.A.C.)과 K-2 전차, K-808 차륜형장갑차 공급에 대한 총괄합의서(Framework Agreement)를 체결했다고 10일 밝혔다.
페루에 공급될 물량은 K-2 전차 54대, K-808 차륜형장갑차 141대다.
이번 합의서는 지난해 11월 체결된 지상장비 협력 총괄협약의 후속 조치다. 품목, 물량, 예산 등 핵심 사항이 구체적으로 담겼다. 실제 사업 착수를 위한 후속 이행계약은 가격 협상 등을 거쳐 내년 상반기 체결을 목표로 진행될 예정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세계 각지의 방위산업 시장이 블록화되는 상황에서 중남미 지역은 K방산에 새로운 돌파구가 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왜 K-2 전차인가
총괄합의서에 이어 이행계약까지 체결되면 국산 전차의 중남미 첫 수출 기록을 달성하게 된다. 국산 전차 완성품의 해외 수출 사례로는 폴란드에 이은 두번째가 된다.
유럽과 러시아의 영향력이 미치는 중남미에서 국산 전차와 장갑차를 대량 구매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로 받아들여진다.
이를 두고 K-방산이 만든 무기가 페루의 환경에 적합했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페루는 10여년 전부터 육군 현대화를 추진해왔다.
하지만 예산 제약과 더불어 국경 감시, 마약 카르텔 소탕 등에 필요한 소총·기관총·무인기 도입이 먼저 이뤄졌다. 옛소련 T-55 전차 등으로 구성된 기계화부대의 현대화는 지연됐다.
하지만 페루 육군 T-55 전차 수명 종료가 임박하면서 전차와 장갑차 도입 사업이 탄력을 받았다. 지난 수 년 동안 이탈리아 센타우로-II, 터키 알타이, 독일 레오파르트2 전차 등이 후보로 거론됐지만, 페루는 K-2를 선택했다.
페루는 안데스 산맥을 끼고 있다. 고도 3000~4000m 산맥을 가로지르는 산악도로는 폭이 좁고 급경사·급곡선 구간이 많다. 노후한 교량은 지탱할 수 있는 하중이 약하다.
무거운 중량을 지닌 전차는 높은 고도에 따른 엔진 출력 저하, 냉각·연료 소모 증가, 브레이크 과열, 현가장치 피로 등의 문제에 직면한다.
설계 단계부터 산악지형 운용을 감안한 전차가 필요한 대목이다.
K-2는 능선·계곡 위주의 한반도 산악전을 고려해서 개발됐다.
반능동 유기압식(ISU) 서스펜션을 장착해 급경사를 오르내리는 능력이 우수하다. 1500마력 엔진은 높은 해발 고도에 따른 출력 저하를 만회할 수 있다.
페루의 태평양 연안 지역에선 K-2의 우수한 사격통제체계와 장거리 사격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기존 T-55와는 차원이 다른 위력을 보여줄 수 있다.
다만 안데스 산맥과 태평양 연안에서 K-2를 원활하게 운용하려면, 후속군수지원이 제대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현대로템은 K-2와 차륜형장갑차가 페루에서 원활히 전력화될 수 있도록 장비 획득과 운용 전반에 필요한 교육훈련 및 군수지원 사항들을 폭넓게 지원할 예정이다.
페루가 K-방산의 특성을 경험했다는 점도 K-2를 선택한 원인으로 분석된다.
페루는 과거 한국항공우주산업(KAI) KT-1 훈련기 20대를 도입했다.
지난해에는 K-808 차륜형장갑차 30대 구매를 결정했다. 지난 8월엔 기아자동차가 생산하는 전술차량(KLTV) 도입 계약을 맺었다.
K-808 차륜형장갑차 제작사인 현대로템은 페루 육군 요구사항을 토대로 K-808에 일부 개량을 진행하게 된다.
외형은 한국군 장갑차와 거의 같다. 다만 급조폭발물과 지뢰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하부 방어력을 강화, 중량이 20t에서 23t으로 늘었다. 도하작전에서 쓰는 워터제트는 제거된다.
이같은 경험은 페루 측이 K-2도 자신들의 요구사항에 맞는 파생형을 제공받을 것이라는 신뢰를 갖게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한국·페루에 큰 의미
이번 합의로 페루는 국가 경제와 방위산업을 함께 발전시킬 기회를 얻었다.
1960∼1970년대 페루에선 도요타, GM, 메르세데스 벤츠, 피아트, 르노, 폭스바겐 등 글로벌 자동차 기업이 세운 공장이 활발하게 가동됐다.
그러나 1980년대 초인플레이션과 내전으로 페루의 자동차 산업은 무너졌다.
산업 재건을 꾀하는 페루는 K-방산을 활용하는 모양새다. 잃어버린 산업 역량을 되살리는 것을 넘어서, 해외 투자를 유치하고 숙련된 엔지니어를 양성하면서 자국 기업을 육성해 최신 기술을 확산하려는 것이다.
실제로 페루 정부는 지난달 루리간초-초시카 지역에서 육군 조병창 주도로 특수 군용 차량 조립공장 준공식을 거행했다.
5,000㎡ 면적의 공장에선 기아자동차 4륜 전술차량과 K-808 차륜형장갑차를 생산한다.
첨단 인프라를 갖춘 공장으로서 월 35~80대의 차량 생산 능력을 갖춘다. 군용 외에도 경찰 순찰차·장갑차, 소방차, 구급차 등의 생산도 추진할 예정이다.
초기 단계에서 8개의 페루 기업이 참여해 국내 산업과 지역 공급망을 활성화해 국방 분야가 민간 산업에 파급 효과를 창출하도록 한다. 현대로템을 비롯한 한국 방산업체들도 부품 공급, 훈련 프로그램, 기술이전 등을 지원하게 된다.
K-2 수출에도 이같은 정책이 적용될 전망이다. 현대로템은 페루와 함께 조립공장을 구축하고 생산 공정 일부를 현지 진행하는 등 적극적인 현지화로 페루 방위산업 생태계 조성을 위한 초석을 마련할 예정이다.
페루 측은 용접, 기계 가공, 전기 및 유압 시스템 분야의 기존 역량을 활용해 자국 산업 참여율을 점진적으로 30%까지 높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페루 육군 군수사령관 호르헤 크리스티안 아레발로 칼리노프스키 준장은 지난 10월 한 포럼에서 “향후 12년간 연간 약 3억6000만 달러의 비용으로 페루 기업들이 서비스 및 부품 공급 인증을 받으며 국내 조립 생산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칼리노프스키 사령관은 “현대로템이 첫 방문에서 페루 산업을 살펴보고 용접, 기계 가공, 전기 부품, 기계화 생산 라인, 유압 부품 분야에서 역량을 확인했다. 이는 30%의 참여율을 달성할 잠재력이 있음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한국은 페루에서의 성과를 토대로 중남미 방위산업 시장에서 영향력을 확대할 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다.
우크라이나 전쟁 초기 K-방산은 폴란드를 중심으로 대규모 수주에 성공, 글로벌 방위산업 시장에서의 지위를 빠르게 강화했다.
하지만 유럽이 ‘바이 유러피언’ 기조를 강화하는 등 방위산업 시장 블록화가 심해지면서 유럽에선 폴란드 잠수함 사업, 노르웨이 전차 사업 등에서 K-방산이 유럽 방위산업체에 밀리는 상황이다.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한 국면이다.
중남미 시장은 K-방산이 공략할 수 있는 지역으로 꼽힌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거액의 기금을 모은 유럽은 역내 기업이나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회원국인 미국 방위산업체에 무기를 발주하는 비중을 늘리려는 모양새다.
중동과 동남아시아는 전통적으로 유럽에 우호적이었다. 유럽 외에 미국·중국·러시아 기업들의 각축전도 치열하다.
중남미는 구매력이 상대적으로 작고 첨단 무기 수요도 크지 않다. 미국이나 유럽 등 글로벌 방위산업체의 진출도 활발하진 않은 지역이다.
경제 문제 등으로 군사력 현대화도 다른 지역보다 늦어진 국가들이 적지 않다. 최첨단 무기보다는 신뢰성과 가성비가 좋은 무기를 선호한다. K-방산의 핵심 아이템인 재래식 무기가 경쟁력을 지닐 수 있는 곳으로 평가받는다.
이같은 특성 때문에 한국도 전임 정부 시절부터 중남미 방위산업 시장에 관심을 가져왔다. 다만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 걸림돌로 지적되어 왔다.
하지만 유럽 시장에서 진입장벽이 높아지고 있고, 중동에서 미국·유럽·중국 기업이 강세를 보이는 국면에서 중남미 시장은 대안이 될 수 있다.
특히 페루는 K-2 계열 차량 추가 수출 가능성도 있다.
앞서 폴란드는 K-2를 구매한 직후 장애물개척전차·구난전차·교량전차 81대 도입을 결정한 바 있다.
페루도 K-2를 운용하면서 폴란드처럼 관련 차량의 필요성을 느낄 가능성이 크다. K-2 수출이 지원차량 추가 판매로 이어질 수 있도록 기업과 정부가 노력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밖에도 지리적 여건과 현지 경제 사정 등을 감안해 현지화를 추진, 역내 기업과 엔지니어의 역량을 높여 후속군수지원 부담을 덜고 구매국의 경제 발전을 돕는 등의 전략을 적극적으로 진행해서 페루를 포함한 중남미 지역에서 성과를 더욱 키워야 한다는 지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