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발레 샛별이 모이는 스위스 로잔 콩쿠르에서 2017년 좋은 성적을 거둔 당시 열여덟살 임선우에겐 국내·외 발레 명문학교를 고를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임선우가 선택한 건 유니버설발레단(UBC) 입단. 당시 결정에 대해 묻자 임선우는 “너무 쉬운 결정이었다. 무조건 바로 발레단으로 바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로잔에 나간 그때쯤 고민을 하긴 했죠. 성인이 되면 대학을 갈지, 발레단을 갈지….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무용수는 몸 관리를 잘해도 수명이 짧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더 오래 춤을 추고 싶으면 하루라도 빨리 발레단으로 가야겠다’였죠.”
발레리노 임선우가 차세대 발레 스타로 떠오르고 있다. 오르는 무대마다 돋보이는 춤으로 갈채와 주목을 받으며 한국발레협회로부터 지난해 신인상을 받더니 올해는 최고 발레리노에게 부는 당쇠르 노브르상을 차지했다. UBC에서도 내년부터는 영예의 수석무용수로 활동하게 된다. 솔리스트로 승급한 지 1년 만에 이뤄진 파격이다.
세계일보와 10일 유니버설아트센터에서 만난 임선우는 “그저 무대에 설 때 기술적으로 완벽하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춤출 때 제가 즐겁고 행복하고 재미있는 게 제일 중요하다”며 “제가 진짜 행복하게 춤을 추면 관객도 진짜 집중해서 몰입하는 게 에너지로 느껴진다. 그 순간이 제일 짜릿하고 너무 감사하는 마음뿐”이라고 말했다.
발레를 시작한 건 여섯살. 약한 몸을 돌보고 자세를 교정하기 위해서였다. “어릴 때 밥도 잘 안 먹고 맨날 만화책만 읽고 해서 몸이 무척 약했어요. 엄마가 발레 하면 자세를 교정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너 발레 해볼래’라고 해서 문화센터에서 취미로 발레를 시작한 거죠. 남자아이는 저 하나였어요.”
소년은 딱 2년 만에 평생 춤을 추기로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갑자기 발레가 너무 재밌어서 ‘나 제대로 해볼래’라고 엄마에게 이야기했다. “아직도 기억나는데 바(봉)를 잡고 ‘퐁듀’라는 기본동작을 하는데 평상시와 다르게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그냥 ‘진짜 매일매일 하고 싶다’ 이런 느낌이었어요.”
그 후로는 오로지 발레였다. 타고난 모범생이어서 발레를 전공하면서도 선화예중 수석입학·졸업, 선화예고 수석입학을 기록했다. 발레 강사 권유로 나간 오디션에서 합격해서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로 무대에 서기도 했다.
임선우의 춤을 향한 형언하기 힘든 열정은 주인공 빌리 엘리어트와 비슷하다. “빌리를 선발할 때 모두 같은 질문을 받아요. ‘춤을 출 때 어떤 기분이 드니?’ 대답을 잘 못 했고 지금도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워요. 빌리가 말로 설명이 안 되니 춤을 추는 게 ‘일렉트리시티’ 장면인데 저도 그 심정이 이해가 돼요.”
UBC에는 입단 직전인 2018년부터 ‘돈키호테’, ‘오네긴’ 등에 군무로 참여했다. 연말 ‘호두까기 인형’ 자선공연에도 주역으로 무대에 섰는데 2019년 입단한 해 정기공연에서 호두까기 왕자로 첫 주역을 맡았다. 그리고 바로 군무에서 ‘드미 솔리스트’로 승급한 2020년 무용수로서 큰 위기에 부닥친다. ‘잠자는 숲 속의 미녀’에 나오는 ‘파랑새’ 춤을 추던 중 크게 다쳤다.
“오른 다리 정강이가 그냥 두 동강 났어요. 무용수는 보통 스트레스 골절로 금이 가면 서너 달, 아니면 반년쯤 쉬다 복귀하는 건데 저는 그냥 한 번에 딱 부러진 거예요. 왼쪽 무릎이 엄청 상태가 좋지 않아서 진통제를 세네알씩 먹으면서 무리를 하느라 모든 동작, 점프를 오른 다리로 바꿨는데 오른 다리가 못 버틴 거죠.”
재활은 3년 반이나 걸렸다. 1년이면 복귀할 수 있으려니 했는데 좀처럼 뼈가 붙지 않았다. 발레를 쉰 지 2년쯤 지나 조금 더 경과를 지켜봐도 차도가 없으면 무대를 향한 마음을 접어야겠다고 반쯤 포기했을 무렵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잘 버티지 못하고 힘들게 버텼죠. 많이 울고, 불면증도 심해지고….”
지난해 2월 복귀 무대를 끝마치고 돌아온 후 임선우는 다시 춤을 출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서 펑펑 울었다. 그리고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벤볼리오·머큐시오를 소화한 후 ‘라 바야데르’에선 발레리노라면 누구나 한번 해보고 싶어하는 ‘황금신상’으로 짧지만 굵고 각 잡힌 춤선을 보여줬다. 이후 다시 선 무대가 ‘잠자는 숲 속의 미녀’였고 부상으로 포기해야했던 ‘파랑새’ 춤을 다시 추게 됐다. “부상 트라우마가 아무래도 계속 있죠. ‘파랑새’를 다시 할 때 엄청 떨렸죠. 그래도 다행히 괜찮더라고요. 사실 잘하든 못하든 다시 춤을 추는 게 너무 좋아요.”
부상 이전과 이후 몸과 마음가짐도 달라졌다. 몸을 아끼고 철저히 관리하고 매일 클래스(훈련)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만족하지 못한 무대가 가끔 있거든요. 자잘한 실수도 있고…. 그래도 제가 행복하고 재밌으면 저는 그게 성공한 무대라고 생각을 해요.”
앞으로 꼭 하고 싶은 작품으로는 여러 고전 발레 주역과 함께 UBC 창작 발레 ‘춘향’의 ‘몽룡’을 손꼽았다. “너무 멋있어요. 저는 ‘방자’를 많이 했는데 형들이 ‘몽룡’하는 거 보면서 기회가 된다면 꼭 하고 싶어요. ‘춘향’은너무 좋은 작품이고 차이콥스키 음악은 완전 이 작품을 위한 음악이어서 너무 신기해요.”
부상으로 인한 긴 공백은 임선우에게 ‘글쓰기’라는 또다른 세계를 개척한 시간이기도 했다. 중3 때부터 매일 빠지지 않고 적은 일기장에 이어 시작한 소설 습작이 어엿한 작가의 길로 나아가게 했다. 내년 봄 그가 쓴 웹 소설이 주요 포털 서비스에 연재될 예정이다. 사이버대 문예창작과를 수석으로 졸업했을 정도로 글쓰기에 진심이었던 결과다.
“늙으면 다시 읽었을 때 재밌을 것 같고, 그래서 뭐 ‘하루에 한 번씩, 진짜 귀찮으면 한 줄이라도 쓴다는 생각으로 써보자’고 일기를 써왔어요. 그리고 글쓰기를 열심히 하는 건 그때 발레를 조금 내려놓고 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재활 경험을 하면서 (발레를) 내려놓는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너무 무용에만 몰두하면 분명히 문제가 생겨요. 무언가 다른 일을 하면서 제가 모르는 저 자신을 발견할 수 있고 또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서 새로운 경험을 하면 그 경험이 발레를 할 때 새로운 감정 표현의 토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올 연말 임선우는 다시 또 호두까기 왕자로 무대에 선다. 임선우는 “전투장면이 끝나고 스노우 파드되로 넘어가는 장면은 항상 설렌다”며 “클라라에게 행복한 꿈을 꾸게 해주는 환상의 캐릭터라 무척 좋아하는 배역”이라고 말했다.
“연말에 가족이 와서 보기 좋은 작품이에요. 춤추는 단원들도 모두 사랑하는 무대이고요. 특히 UBC의 ‘호두까기 인형’은 따뜻하고 포근한, ‘야∼! 크리스마스 선물이야’ 이런 느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