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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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포럼] 우리가 알던 미국이 아니라고?

입력 : 2025-12-17 23:34:57
수정 : 2025-12-17 23:3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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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위대하게’ 구호는 늘 반복
자국 보호주의, 미국 역사의 본질
동맹이 우릴 지켜줄 거란 기대 접고
권력다툼과 정쟁 무한 반복 멈춰야

설마 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9월 백악관 오벌 오피스에서 ‘트럼프 골드카드’ 포스터를 세워 두고 설명할 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지난 10일 그가 트루스소셜을 통해 ‘트럼프 골드카드’가 출시됐다며 공식 신청 웹사이트를 소개하자 ‘현타’(현실 자각 타임)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이 카드는 고액 기부 또는 투자를 조건으로 미국 영주권에 준하는 체류 자격을 부여하는 비자 프로그램이다. 미 행정부가 관세 폭탄도 모자라 개인에게 15억원짜리 영주권 장사에 나서리라곤 미처 생각지 못했다. 미국에 비자 없이 입국할 수 있는 전자여행허가(ESTA) 신청도 까다로워진다는 소식도 접했다. 5년간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정보를 제출토록 해 개인 신상을 탈탈 털겠다는 거다. 그들의 유치하고 무례한 행동에 짜증을 낸 적이 더러 있었으나 꽤 낯설다. 지난 9월 미국 이민 당국이 조지아주의 현대차와 LG엔솔 공장 건설 현장을 급습해 근로자 수백 명을 체포한 사건은 예고편이었던 셈이다. ‘워터게이트 사건’을 특종보도했던 밥 우드워드가 지난해 말 출간한 ‘전쟁’(War)에서 “트럼프는 역사상 가장 무모하고 충동적인 대통령”이라고 평한 것에 수긍이 갈 수밖에. 그래서 많은 이가 묻는다. “우리가 알던 미국이 맞냐”고.

미국은 유럽 이민자들이 건설한 나라다. 서로 다른 인종, 종교가 섞여 있다. 다문화주의 정체성 위에 자유주의가 자리 잡았다. 자유주의 토대 위에 국가를 운영하려니 통합 수단으로 ‘미국을 위대하게’ 구호는 늘 반복됐다. 그런 미국이 한국인에게는 ‘은혜의 나라’로 비친다. 6·25전쟁과 냉전 시대를 거치며 만들어진 고정관념이다. 군사정권 시절 반미는 곧 ‘친북’이라는 등식까지 성립될 정도였다. 그렇게 우리와 너무나 가까운 미국이지만, 미국을 정확히 알고 있는가에 대해선 의문이 작지 않다.

박병진 논설위원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It’s the economy, stupid!)란 구호를 앞세워 1993년 1월 집권한 빌 클린턴 행정부는 교착상태에 있던 우루과이라운드 세계무역 협상을 타결짓고는, 95년 1월 기존의 관세무역 일반협정(GATT·가트)을 대체하는 세계무역기구(WTO)를 출범시켰다. 세계 각국에다 무역 장벽의 완화 또는 제거를 일방적으로 요구했다. 이름하여 세계화다. 충격파는 상당했다. 개발도상국 한국도 마찬가지다. 약육강식 경제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쳤다. 그로부터 30여년이 흘렀다. 트럼프 대통령이 고율 관세를 앞세워 미국의 만성적인 무역적자를 해소하겠다며 나섰다. 클린턴 행정부 때와 논리 전개는 정반대다. 그러나 기저에 깔린 패권 추구의 틀은 동일하다. “미국이 다시 돌아왔다”(America is back)고 강조한 조 바이든 대통령이나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를 외친 트럼프의 ‘리쇼어링’(Reshoring) 접근법도 겉모양만 다를 뿐, 속내는 자국 이익을 강요하는 보호주의 무역이다. 미국 역사가 가진 공통 DNA(유전자)다. 이를 무시하고 피상적으로 판단하면 착각과 고정관념에 빠질 수밖에 없다. 작금의 상황이 우리가 알던 미국이 아니라며 흥분하거나 분노할 게 아니라는 말이다.

국제무대에서 계속되던 미국의 독주는 멈춰 섰다. 중국의 굴기(堀起)가 예상을 뛰어넘는 속도로 진행된 탓이다. 판세를 뒤집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트럼프의 좌충우돌은 그만큼 미국이 다급해졌다는 의미다. 미·중 패권 경쟁에서 한반도는 어떤가. 벗어나기는커녕 생존을 위협받을 정도다. 줄타기에 앞서 자강 요구가 빗발치는 이유다. 동맹이 우릴 지켜줄 거란 헛된 기대도 접어야 한다. 지정학 전문가인 피터 자이한은 저서 ‘각자도생의 세계와 지정학’에서 “한국의 성공을 가능케 했던 세계질서가 붕괴하고 있다”며 “산업구조만 뜯어고치는 데 그치지 않고 사회 정치적 구조 전체를 바꿔야 한다”고 설파했다. 12·3 비상계엄 1년이 흘렀지만, 권력다툼과 정쟁은 무한 반복이다. 민생은 뒷전이다. 통합이나 화합 대신 증오가 만연하며 소통 불능 사회에 다가섰다. 이렇게 가다간 자멸이다. 멈춰 세워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