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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진 너머의 미래』 안병기 “캐즘 겪지만 결국 전기차가 대세…자율주행과 SDV 주목해야” [김용출의 한권의책]

입력 : 2025-12-21 08:00:00
수정 : 2025-12-20 15:2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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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차 프로그램이 연기되고 취소되는 상황이 연이어 발생하면서, 배터리 업계뿐만 아니라 모든 방향을 전기차에 맞추던 부품 공급사들도 타격을 피해가지 못했다... 전기차에 집중 투자를 한 기업들은 모두 크고 작은 손실을 입게 되었지만, 가장 큰 피해는 아무래도 배터리 생산 업체나 배터리 조인트벤처에 투자한 기업들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공장과 설비에 투자하는 금액이 타 업종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컸기 때문이다.”(33쪽)

테슬라 전기차 모델S P100D, BYD의 전기차 씰(SEAL). 세계일보 자료사진

가파르게 상승하던 전기 자동차 판매와 시장 점유율이 정체를 보이기 시작하자 상황은 급격히 변화했다. 막대한 전동화 투자를 진행했던 GM과 포드를 비롯한 미국 빅3 자동차 업체는 적자 확대와 생산 차질로 인해 전기차 로드맵을 잇따라 연기하거나 축소하고 나섰다. 독일의 폭스바겐 역시 전기차 확대 계획을 일부 후퇴 시키며 다시 내연기관차 비중을 늘리고 있다. 무엇보다 전기차 시대를 선도해온 테슬라조차 성장 둔화와 가격 인하 압박을 받으며 수익성의 한계를 노정하기 시작했다.

 

이 같은 모습은 배터리 가격 문제와 화재를 비롯해 배터리 안정성 논란 등 기술적 요인과 함께, 충전 인프라 부족, 소비자 불편, 보조금 축소와 가격 부담 등 비기술적 요인이 결합되면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들이다.

 

이 틈을 배터리 크기를 줄여 가격을 낮춘 반면 충전 불편을 최소화한 하이브리드 자동차가 파고들었다. 현대자동차그룹과 세계 자동차 판매 1위를 달리는 도요타는 하이브리드차를 기반으로 성장세를 이어갔다. BYD를 비롯한 중국 전기차 업체들 역시 배터리 기술과 수직 계열화된 공급망을 무기로 글로벌 시장 점유율을 폭발적으로 늘리고 있다.

토요타의 하이브리드차 크라운 2.4 듀얼부스트. 세계일보 자료사진

2024년 하반기부터 장밋빛 일색이던 전기차 시장에 어두운 그림자가 돌연 드리우기 시작했다. 첨단 기술 및 혁신 제품이 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하는 과정에서 겪는 일시적인 침체 또는 수요정체 현상인 이른바 ‘캐즘’이 전동차 시장에 몰아닥친 것이다. 일각에선 전기차 열풍은 찻잔 속 태풍이 아니냐는 비관적인 목소리조차 나올 지경이다.

 

작금의 전기차 캐즘을 어떻게 봐야 하는 것일까. 자동차 산업의 패권이 재편되는 거대한 전환점 앞에 선 것이라면, 산업의 패권을 누가 가져가게 될 것인가. 전기차 전환은 과연 어디까지 가능하며, 전동화의 속도는 어떻게 재조정될 것인가. 자율주행으로 대변되는 AI와 자동차 산업의 융합은 어떤 방식으로 발전할 것인가.

 

30년 가까이 모빌리티 엔지니어이자 자동차산업 글로벌 전략가로 활동해온 저자는 신간 『엔진 너머의 미래』(흐름출판)에서 작금의 전기차 캐즘은 단순한 전기차 판매 둔화나 시장의 냉각이 아니라 기술과 정책, 정치, 소비자 행동이 한꺼번에 재배열되는 구조적 변화라고 진단한다. 그러면서 전기차의 역사와 기술, 정책, 지정학적 관점에서 거대한 전환기 앞에 선 전기차 산업의 과거와 현재를 분석하고 패권의 향방과 그 변수를 조심스럽게 조망한다.

 

책에 따르면,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인 1890년대 후반부터 19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미국 뉴욕과 영국 런던 도로에서 운행되던 자동차의 약 38%가 놀랍게도 전기차였다. 소음과 배기가스가 없고 조작도 쉬워 내연 기관차보다 세련된 기술로 주목받으며, 포드 자동차의 창업자 헨리 포드의 아내와 발명왕 에디슨, 석유 재벌 록펠러 등 상류층이 전기차를 선택한 것이다. 반면 내연기관 자동차의 점유율은 당시 22%에 불과했다.

 

하지만 시동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주행 거리 역시 짧은 전기차 배터리 기술의 한계와, 휘발유 엔진 관련 기술의 비약적 발전, 모델 T로 상징되는 포드 자동차의 내연기관차의 대량생산 체계 등장과 함께 1920년대 이후 전기차 시대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현대차의 전기차 아이오닉 시리즈. 세계일보 자료사진

전기자동차는 내연기관차가 주도하던 1920년대부터 1960년대 사이에 사라졌다가 1970년대 오일 쇼크에 따라 잠시 다시 주목받는 듯 했지만, 일본 소형차 공세에 밀려 성장하지 못했다. 하지만 2003년 전기차 업체 테슬라가 등장하면서 다시 전기차 시대가 되돌릴 수 없는 대세가 돼갔다.

 

책은 1900년대 초반 전기차 전성기부터 내연 자동차 시대를 거쳐 2024~25년 전기차 캐즘까지 긴 역사를 개괄한 뒤, 지금은 비록 전기차 캐즘을 겪고 있지만 결국 전기차가 자동차 산업을 선도할 것이라고 예견한다.

 

“수십 년간 환경차 옹호론자들이 언급했던 지구온난화와 화석연료 고갈은 차치하더라도, 기술적 관점에서 볼 때 전기차가 점차 대세가 되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한동안은 하이브리드 차량이 시장을 선도해 가겠으나, 자율주행과 SDV(소프트웨어 중심 자동차)에 최적화된 차량이 전기차임을 생각하면 환경문제와 무관하게 전기차의 비중은 늘어날 것이다.”(80쪽)

저자는 특히 미 제조업의 쇠퇴와 불법 이민자들의 보조 혜택에 대한 중산층 반발을 기반으로 재선에 성공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복귀를 주목하면서 미국 우선주의를 전면에 내건 트럼프 시대를 제대로 읽어야 앞으로 10년이 보일 것이라고 분석한다.

 

그러면서 향후 10년 자동차 산업을 좌우할 핵심 분야로 배터리 기술 전환, 자율주행 알고리즘 경쟁, 데이터를 바탕으로 한 SDV를 꼽고 이를 집중적으로 살핀다. 특히 자동차를 기계가 아니라 인공지능을 바탕으로 한 자율주행과, 차량 내 서비스 확장 등 전혀 새 비즈니스 모델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SDV를 주목한다.

 

“첨단 기술을 선도하는 거대 기업조차 실패한 사례를 남기는 자율주행 분야에서 어느 기업이 생존하고 주도권을 지는가의 여부는 2035년 이후 자동차 산업의 판도를 또 한 번 뒤집을 것이다. 현재 몇몇 기업이 주도하고 있는 높은 수준의 자율주행 기술이 상용화하려면 아직도 최소 5년 정도의 시간은 필요하다.”(233쪽)

 

실제로 테슬라는 이미 자동차 제조사가 아니라 AI(인공지능)와 로봇, 그리고 데이터 기업으로 빠르게 변모하고 있다. 심지어 “하드웨어로 진입해, 소프트웨어로 수익을 창출하는 플랫폼 기업”을 표방할 정도다. 중국 기업 웨이모와 바이두 역시 자율주행 기술을 바탕으로 로봇택시 생태계를 조정하며 서비스를 재편 중이다.

 

각국의 대응 역시 본격화하고 있다. 미국은 IRA(인플레이션 감축법)와 중국산 배터리 및 부품 규제를 통해 공급망 재편을 주도하고 있고, 유럽 또한 지역 생산 의무화를 강화하고 있다. 중국은 BYD와 CATL를 중심으로 가격과 규모, 기술을 결합한 압도적 공세를 펼치며 세계 시장으로 돌진 중이다.

 

저자는 결국 한국 기업과 정부가 취해야 할 전략으로 하이브리드 전략 강화와 배터리 플랫폼 혁신, SDV 전환 가속, 글로벌 공급망 재편 등을 조언한다.

 

“지금이야말로 관련 기업들이 전략을 제대로 수입해야 한다. 소비자들이 원하는 자동차가 무엇인지 조사하고 고민해서, 내가 만들고 싶은 차가 아니라 그들이 갖고 싶어하는 차를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 치열해지는 미래 자동차 시장에서 생존할 수 있다.”(10쪽)

자율주행 셔틀버스. 세계일보 자료사진

요컨대, 책은 자동차업계 및 정부 관계자는 물론 투자자, 미래 산업에 대해 궁금한 사람 모두에게 전기차, 배터리, 자율주행, 정책, 공급망에 대한 폭넓고 신선한 통찰을 제시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묻는 조언한다. 자동차 판매량 3위의 자동차 기업을 보유하고 있고 자동차 생산량이 세계 5위를 차지하는 대한민국에게 결단과 결행의 시간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고.

 

“우리보다 앞서 자동차 산업을 일으킨 미국과 유럽기업들로부터는 견제의 대상이, 후발주자인 중국 기업들에게는 도전이 대상이 되었다. 우리가 가진 강점을 살려서 지금의 위치에서 한층 더 도약하지 않으면, 2030년 혹은 2035년에 재편되는 자동차 세계 지도에서 우리 영토는 줄어들어 있을지도 모른다.”(30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