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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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또다시 금 모으기

입력 : 2025-12-22 22:59:44
수정 : 2025-12-22 22:5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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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외환위기 극복의 중심에는 당시 민관이 주도한 금 모으기 운동이 있다. 대우그룹이 금 모으기 운동을 전개한 것을 계기로 주요 방송과 신문이 적극 홍보하며 범국민 캠페인이 됐다. 그 결과 227톤(t)의 금이 모였고, 당시 환율로 21억달러의 외채를 상환할 수 있었다.

당시 국가신용등급이 추락한 상황에서 정부나 기업, 개인이 국내에 가진 자산은 제값을 하지 못했다. 달러가 부족해진 상황에서 금을 모은 것은 사실상 달러를 대체할 수 있는 유일한 실물자산이기 때문이다. 당시 개인이 가진 금을 정부나 기업, 은행에 맡기면 해외에 팔아 달러를 확보했다. 금을 내놓은 개인은 원화로 값을 지불받았다.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개인의 실물자산을 원화로 바꾸는 위험부담을 감수한 것이다.

권구성 경제부 기자

최근 수개월째 지속되는 고환율 상황에서 정부가 내놓은 대책들은 1997년 금 모으기 운동을 떠올리게 한다. 개인과 기업, 공적연금에게 달러 시장에 투자하는 것을 자제하고, 원화 시장에 투자하도록 독려하는 방식이다. 달러(금) 대신 원화를 더 많이 갖고 있으란 의미다.

그때나 지금이나 방식은 유사하지만 시장의 반응은 사뭇 다르다. 서학개미로 불리는 개인 투자자들은 역대 최대 규모로 달러 시장에 자금을 투입하고 있다. 기업들 역시 보유하고 있는 달러를 쉽사리 원화로 바꾸지 않으려고 한다. 공적연금인 국민연금조차 해외투자 비중이 국내투자보다 많다. 정부는 이들에게 사실상 달러를 내놓고 국내시장에 투자하라고 하지만 그 방식이나 결과에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1997년의 경제위기는 개인과 개인이 뭉쳐 힘을 발휘하게 했다면, 2025년에는 위기가 구심점으로 작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개인과 개인이 뭉치기엔 그사이 개인 간의 격차가 크게 벌어진 탓이다. 빈부 격차와 소득 양극화, 노동시장 이중구조가 고착화된 결과 원심력이 강해진 것이다.

1997년 한국의 지니계수는 처분가능소득 기준 0.257에 그쳤다. 소득 불평등도를 보여주는 지니계수는 0에 가까울수록 평등, 1에 가까울수록 불평등을 뜻한다. 이듬해인 1998년에는 0.285, 1999년엔 0.288로 꾸준히 상승했다. 그 사이 통계집계 방식에 변화가 있지만, 가장 최근 통계인 2024년 지니계수는 0.399로 크게 올랐다.

여기엔 세대 간 자산 격차도 기인한다. 달러 시장에 투자하는 대표적인 방식이 주식이라면 원화 시장에선 부동산을 꼽을 수 있다. 부동산 자산은 나이에 비례에 증가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서학개미를 자처하는 사회초년생에겐 수십억대의 부동산 투자보다 태평양 건너 미국 증시가 현실적인 투자처인 셈이다. 고환율은 국내 자산가치를 떨어뜨리지만 환율이 안정된다고 국내 자산 격차가 좁혀지는 것은 아니다.

환율이 한 국가의 경제에 대한 종합평가라면 경제는 그 국가의 사회상을 반영한다. 외환위기 이후 빈부 격차를 메우지 못한 정책과 부동산을 통해 자산 격차를 벌이도록 유도한 시장, 그런 정책과 시장을 방치한 정치가 오늘날의 환율을 만든 셈이다.

누군가는 외환위기를 극복했다고 말했지만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정부는 또다시 금을 내놓으라고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