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한국 방문을 이틀 앞둔 지난 10월27일 기자들과 만나 “그(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를 만나면 정말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달 21일 김 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과의 “좋은 추억”을 언급한 것이 재차 주목받으며 두 정상이 만났던 6년 전의 상황이 소환됐다. 2019년 6월, 트럼프 대통령은 방한을 앞두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김 위원장을 향해 ‘만나자’는 메시지를 띄웠다. 김 위원장이 즉각 호응했고, 판문점 회동이 성사됐다.
두 정상의 ‘깜짝 회동’ 재연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른 가운데 만남에 무게를 두는 분석이 조심스럽게 나왔다. 하지만 이 모든 게 무색할 정도로 북한은 일절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트럼프 행정부 1기이던 2019년과 2기인 2025년 북한의 태도가 극적으로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달라진 태도는 다시 대면한 ‘트럼프의 미국’을 향한 북한의 변화한 요구를 반영한 것은 아닐까. 세계일보는 통일부 북한정보포털과 북한 조선중앙통신, 노동신문 보도를 바탕으로 2기 트럼프 행정부가 출범한 올해 1월20일∼11월30일, 1기 첫해인 2017년 같은 기간 북한의 대미 메시지 총 303건(2017년 245건, 2025년 58건)을 수집·분석했다. 2025년 북한은 2017년에 비해 메시지를 줄이고 정교화, 체계화했다. 트럼프 대통령을 ‘다뤄 본’ 경험치, 이전과 달라진 국제적 위상을 자부하는 듯 북한은 메시지에 초강대국 미국과 맞먹어 보겠다는 ‘배짱’까지 담았다.
◆메시지 줄이며 메신저 체계화·정교화
2017년에 비해 올해 대미 메시지가 크게 줄어든 것은 발신 주체를 정리해 체계화한 영향으로 풀이된다.
2017년에는 외무성, 군부,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등 주요 기관은 물론 국제문제연구원 법률연구소 소장 등 개인 명의의 메시지까지 나왔다. 트럼프 대통령이 김 위원장을 ‘로켓맨’으로 부르며 “북한을 완전히 파괴할 수도 있다”고 강경 발언을 내놓자 6일에 걸쳐 다양한 기관에서 12차례 성명을 낸 게 대표적인 사례다.
반면 올해는 개인 명의의 메시지가 사라졌고 연설, 성명, 담화, 논평 등으로 정리됐다. 또 고위급이 먼저 메시지를 내면 점차 중요도가 낮은 기관이 이를 따르는 경향을 보였다. 한·미 연합훈련이 진행 중이던 지난 8월10일 김 위원장이 담화를 냈고 이어 11일 외무성에서, 12일 인민군 총참모부 대변인이 논평을 발표했다. 메시지에 ‘핵전쟁 도화선’, ‘전멸적 대응’, ‘압도적 자위력’ 등 북한 특유의 극단적 표현이 반복적으로 사용된 것은 물론이다.
홍민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예전에는 특정 사안이 불거지면 일제히 들고일어나 히스테릭한 모습을 보였지만 지금은 훨씬 정교해졌다”며 “김 위원장부터 실무급까지 누가 언제 나설지 체계가 잡힌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올해 메신저가 체계화되고, 메시지가 정돈된 인상을 주는 이유로 북한의 노선이 확실하게 정해졌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김 위원장은 2019년 12월 전원회의에서 미국의 지속적인 대북 제재와 압박에 맞서기 위해 ‘정면돌파 노선’을 제시했다. 제재 해제에 기대지 않고 자력갱생으로 경제를 살리겠다는 선언을 한 것이다. 지금까지도 하나의 노선을 확실히 유지해 오고 있기 때문에 일관된 메시지가 나온다는 분석이다. 최근까지도 김 위원장이 지방 공업공장 등을 찾아 자력갱생을 강조하고 있다.
◆“미국과 대등한 지위 자부하는 메시지”
2017년에 비해 북한은 올해 메시지에서 미국에 대한 자신감을 보였다.
트럼프 1기가 출범한 2017년은 북한과 미국 사이 긴장이 최고조에 달한 해로 평가된다. 북한은 6차 핵실험, 미국 본토 타격을 염두에 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미사일 발사 등을 이어갔고, 미국은 “모든 옵션이 테이블 위에 있다”고 밝히며 경고 수위를 높여갔다.
그러면서도 북한은 ‘대화 불가’를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조선중앙통신은 그해 6월 “미국이 대화를 압박의 연장으로 여기면 대화가 열린다 한들 언어소통이 과연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라며 협상을 읍소하는 듯한 모습까지 보였다.
하지만 올해 북한은 트럼프 대통령의 대화 제의에 주로 침묵했고, 대화는 북한 비핵화를 포기할 때만 가능하다고 분명한 선을 그었다. 김 위원장은 지난 9월 최고인민회의 연설에서 트럼프 대통령과의 “좋은 추억”을 언급하면서도 “허황한 비핵화 집념을 털어버리라”고 도발했다.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은 지난 7월 “핵을 보유한 두 국가”를 언급하며 “새로운 사고를 바탕으로 다른 접촉 출로를 모색해 보라”고 밝혔다. 북한이 미국과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차두현 아산정책연구소 부원장은 “트럼프 행정부를 상대해 본 경험이 있다 보니 일단 자기네 조건을 내거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며 “북한 스스로 미국과 대등한 지위에 올랐다는 어투도 보인다”고 평가했다.
이 같은 경향은 내년 초 열릴 것으로 보이는 제9차 당대회에서 내놓을 대미 전략에도 담길 것으로 예상된다. 북한은 핵무력 고도화 노선을 유지하면서 강경 전략을 이어갈 가능성이 높다. 특히 내년 중간선거를 앞둔 트럼프 행정부가 국내 정치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는 상황에서 북한이 먼저 미국에 대화를 제안하거나 대미 전략을 수정하더라도 미국이 받아들일 여지가 부족하다고 판단할 수 있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당대회에서 기존 자위적 억제력을 강화하는 입장을 재확인하고, 외부 위협에 맞서 내부 결속을 다지는 데 집중할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변화 배경 ‘하노이 노딜’, 중·러와 관계개선
변화의 주요한 배경으로 세 가지가 꼽힌다. 2019년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북·미 정상회담이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난 것이 두드러진 요인이다. 2017년 북한은 미국을 향해 적대적 자세와 대화 의지를 함께 담은 메시지를 냈으나 2019년 2월 하노이 회담 결렬 후 판이 바뀌었다. 북한은 미국의 태도가 일방적이라고 판단했고 대화의 여지는 크게 쪼그라들었다.
올해 초 우크라이나 전쟁 파병으로 러시아와의 관계가 한껏 좋아지면서 미국에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할 이유가 줄어든 것도 빼놓을 수 없다. 지난 9월에는 중국 전승절 80주년 행사에 참석해 중국과의 관계 개선에도 성공했다. 행사의 주무대였던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나란히 선 김 위원장의 모습은 북한의 강화된 외교적 위상을 상징하는 장면이었다. 외교적 뒷배를 든든히 한 북한은 미국의 움직임에 긴박하게 반응하지 않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계산된 메시지를 내는 방식으로 전환할 수 있었다.
또한 김정은 체제가 공고화되면서 지도자의 상징성이 높아졌고, 대외 전략에서도 메시지를 통제하고 상징화하는 방식이 자리 잡았다. 대미 메시지에서 김 위원장, 김 부부장의 비중이 커진 것이 이런 흐름을 대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