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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소야대’면 정부 무력화, ‘여대야소’면 의회 무력화’?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입력 : 2025-12-30 07:00:00
수정 : 2025-12-29 17:3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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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형배 전 헌법재판소 재판관은 지난 4월 11일 자신의 블로그에 “대통령과 국회 사이 갈등은 쉽게 생기는데 그 갈등을 해결할 방도가 없다”라고 적었다. 문 전 재판관이 공석인 헌재소장 권한대행 자격으로 윤석열 전 대통령에게 ‘파면’을 선고하고 1주일이 지난 뒤였다.

 

이 글이 문 전 재판관 본인 의견은 아닌 듯하다. 1948년 제정된 대한민국 최초 헌법을 기초한 법학자 유진오(1906∼1987) 박사가 대통령제의 문제점을 꼬집으며 한 말을 인용했다고 한다. 애초 유 박사가 중심이 돼 만든 헌법 초안이 의원내각제 권력 구조였다는 점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것이 이승만(1875∼1965) 초대 대통령에 의해 뒤집혔다는 사실 또한 유명하다.

2019년 2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이 연방의회에서 신년 국정 연설을 시작하기 전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과 악수하고 있다. 당시 미 하원은 야당인 민주당이 다수당인 여소야대 국면이었다. 펠로시 바로 왼쪽은 마이크 펜스 부통령 겸 상원의장. AP연합

미국에서 오래 생활하고 공부하며 학사는 물론 석사와 박사 학위까지 미국 대학교에서 받은 이 대통령이 미국식 대통령제에 익숙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신생 공화국인 한국이 내각제가 아닌 대통령제를 채택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선진국 클럽이라는 주요 7개국(G7) 가운데 온전한 의미의 대통령제 국가는 미국 하나뿐이다. 프랑스는 대통령이 속한 여당이 의회 과반 다수당인 경우에만 대통령제처럼 운영되는 반(半)대통령제의 나라다. 지금 의회가 여소야대인 프랑스는 대통령제 국가로 보기 어렵다. 2017년 기세 좋게 등장한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현재 아무런 힘도 못 쓰는 ‘식물 대통령’에 불과하다.

 

정치학자들은 대통령제의 가장 큰 특징으로 ‘이중의 정통성’(Dual Legitimacy)을 꼽는다. 국민 직선으로 선출된 대통령과 역시 각 지역구 주민이 직접 뽑은 의원들로 구성된 의회가 나란히 존립하며 국가의 정통성을 양분하는 현실을 지적한 것이다.

2019년 12월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이 야당인 민주당이 다수당인 하원에서 공화당 소속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됐음을 선포하며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물론 여대야소 국면에서는 대통령이 우위를 점한 채 의회의 협조를 이끌어낼 공산이 크다. 하지만 여소야대 정국이라면 얘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소수당인 여당은 기를 못 펴는 가운데 거대 야당이 주도하는 의회가 “누가 진짜 민의를 대표하는지 한 번 겨뤄보자”며 대통령과 행정부에 도전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이 과정에서 거의 모든 대통령제 국가 헌법에 보장된 의회의 탄핵 또는 탄핵소추 권리가 대통령을 노린 ‘최종 병기’로 요긴하게 활용되지 않겠는가.

 

낸시 펠로시 전 미국 연방의회 하원의장은 도널드 트럼프 1기 행정부 시절 대통령 탄핵소추를 두 차례나 주도했다. 당시 하원은 야당인 민주당이 다수당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탄핵심판권을 쥔 상원에서 둘 다 부결되는 것으로 끝났다. 그 펠로시가 28일 언론 인터뷰에서 트럼프에 대한 세 번쨰 탄핵소추 가능성을 언급했다. 2026년 11월 총선에서 민주당이 이겨 하원이 여소야대로 바뀐다는 가정 하에서다.

 

펠로시는 트럼프의 공화당이 장악한 지금의 여대야소 하원을 겨냥해 “그들은 대통령이 요구하는 대로만 움직인다”며 “의회를 무력화했다”고 맹비난했다. ‘대통령과 의회가 병존(竝存)하며 견제·균형의 원리를 실천에 옮긴다’라는 대통령제의 미덕은 이제 정치학 교과서에나 나오는 고리타분한 설명이 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