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 김병기 원내대표가 여러 의혹 속에 임기를 절반밖에 채우지 못하고 불명예 퇴진한 것은, 특검법안과 개혁입법으로 대야 압박 수위를 높여야 하는 정국에서 자신의 존재가 부담이 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3년 전 지방선거 당시 서울시당 공천관리위원이던 강선우 의원 측이 김경 서울시의원으로부터 1억원을 수수한 사실을 듣고도 이를 문제 삼지 않은 정황이 담긴 대화 녹음이 공개되면서 김 전 원내대표는 더욱 궁지에 몰렸다. 그때 김 전 원내대표는 서울시당 공천관리위 간사였다.
◆강선우·김경 윤리감찰, 김병기 제외
30일 정치권에 따르면 김 전 원내대표는 최근까지 본인 의혹을 ‘정면 돌파’하겠단 의지를 주변에 뚜렷하게 드러내 왔다. 그러나 당내에선 원내대표 보궐선거 가능성이 제기되며 김 전 원내대표의 사퇴 가능성에 주목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그 와중에 김 전 원내대표가 2022년 실시됐던 8회 지방선거 당시 강 의원 측의 금품 수수 사실을 강 의원으로부터 직접 보고받은 내용이 담긴 녹음파일이 언론보도로 나오면서 사퇴 방침이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은 우선 금품 수수 의혹을 당내 윤리감찰단에 회부해 자체 조사하기로 했다. 강 의원과 김 시의원이 조사 대상이다. 김 전 원내대표에 대한 조사는 하지 않기로 했다. 민주당 박수현 수석대변인은 긴급 최고위원회의 이후 취재진에 “김 전 원내대표에 대해선 (정청래 대표가) 윤리감찰을 지시하지 않았다는 얘기”라면서도 구체적 이유를 밝히지 않았다. 금품 수수 과정에 김 전 원내대표가 관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점, 김 전 원내대표가 현역 의원들의 투표로 선출된 지도부 일원이었던 점을 고려한 조치로 해석됐다.
대화 녹음상 김 전 원내대표는 강 의원에게 “1억원 받은 걸 사무국장이 보관하고 있었다는 것 아니냐”며 돈을 김 시의원에게 돌려주라고 했다. 김현정 원내대변인은 “(김 전 원내대표가) 정치적으로 책임지고 사퇴했다. 당장 그런 결정을 하기엔 이르다고 (정 대표가) 판단한 것 같다”고 했다. 강 의원과 김 시의원은 ‘공천 대가로 금품을 주고받은 적이 없었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당시 김 시의원이 서울 강서구 제1선거구에 단수 공천을 받아 당선됨에 따라 특혜를 입은 듯한 모양새가 됐다.
당장 보수 야권은 공세의 빌미를 놓치지 않을 기세다. 국민의힘 최보윤 수석대변인은 김 전 원내대표를 겨눠 “의원직에서 즉각 사퇴하고 제기된 모든 의혹에 대해 성실히 수사에 임해야 한다”고 했다. 개혁신당 정이한 대변인도 “즉각 의원직을 사퇴하고 자연인 신분으로 수사기관에 출석해 ‘공천 장사’의 전모를 이실직고해야 한다”고 압박했다.
◆‘文 유임’에 도덕성 타격
민주당 의원들은 김 전 원내대표를 둘러싼 각종 의혹 수위가 날로 높아진 데 대해 부담감을 느끼면서도 “우리가 선출한 원내대표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기가 부담된다”는 반응이었다. 이는 지난 2일 인사 청탁 논란을 빚은 문진석 원내운영수석부대표를 대했던 당내 반응과는 차이가 있다. 비록 비공개였지만, 논란 직후 열린 의총에선 “문 원내수석이 당직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으로 전해졌다. 한 현역 의원은 “문 원내수석이 자리에서 버티는 모습을 국민들이 보면 민주당이 ‘기득권 세력’으로 비칠 수 있다는 비판과 진정성 담긴 충언으로 기억한다”고 했다.
하지만 문 원내수석은 인사권자인 김 전 원내대표에게 자신의 거취를 일임했고, 김 전 원내대표는 그를 유임시켰다. 결과적으로 당내 비위 의혹 속에 물러난 김 전 원내대표의 직무를 인사 청탁 논란의 장본인인 문 원내수석이 대신 수행하는 모습이 당분간 이어지게 됐다. 문 원내수석은 “당헌·당규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민주당 당헌은 원내대표가 공석이 될 경우 원내수석이 직무를 대신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민주당 한 중진 의원은 “당이 어떻게 되려고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김 전 원내대표를 둘러싼 각종 의혹은 강 의원의 ‘갑질 의혹’과 겹쳐지는 모양새다. 강 의원은 이재명정부 출범 후 첫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됐지만, 본인 의원실 직원들을 상대로 다양한 갑질을 한 의혹이 불거지면서 낙마했다. 현역 의원이 국무위원 후보자 신분으로 낙마한 헌정사상 첫 사례였다. 그런데 김 전 원내대표 또한 옛 보좌진에 각종 사적 심부름을 시키고, 국가정보원 직원인 아들 업무를 대리시켰다는 의혹 등이 제기되면서 리더십은 물론 도덕성에도 적잖은 상처를 입게 됐다.
민주당 한 초선 의원은 “김 전 원내대표를 알고 지낸 지가 오래됐다. 괜찮은 사람이라고 그간 생각해왔다”면서 “의원 신분으로 국회 안에서 바라보니 ‘내가 알던 그 사람하고 좀 다르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됐다”고 털어놓았다. 일각에선 “이번에 제기된 의혹은 지방선거 관련이지만, 22대 총선 공천과 관련해서도 우리가 모르는 의혹이 또 있을까 봐 우려된다”는 반응이 나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