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중국의 기술 패권 경쟁이 격화되면서 한국 사회에도 “서둘러 대응하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그러나 글로벌 인공지능(AI)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작정 속도를 높이는 ‘추격’이 아니라, 국가가 통제해야 할 영역과 협력할 영역을 냉철하게 구분하는 ‘전략적 방향 설정’이라는 제언이 나왔다.
최종현학술원 과학기술혁신위원회는 14일 이같은 내용을 담은 ‘AI 주권 시대, 대한민국의 선택’ 보고서를 발간했다. 보고서는 AI 전략을 ‘국산화냐 글로벌 활용이냐’의 이분법적 논쟁에서 벗어나 한국의 현실적 강점을 바탕으로 실리적인 ‘경계 설정’에 나설 것을 주문했다.
◆“소버린 AI 개념 재정의해야”
보고서는 우선 소버린(주권적) AI를 “모든 것을 국산화하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핵심은 ‘통제할 것’과 ‘협력할 것’을 나누는 기준이다.
보고서는 글로벌 빅테크의 오픈소스 모델에 국가 인프라를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오픈소스 정책은 언제든 변경될 수 있고, 미국의 ‘클라우드 액트’ 등에 따라 미 행정부가 미국 기업이 운영하는 해외 데이터센터에 저장된 데이터에 대한 접근 권한을 행사할 수 있어서다.
이에 ‘자립과 연계’ 전략의 필요성이 부상하고 있다. 보고서는 행정·안보·공공 데이터 등 국가 책임이 필수적인 영역은 자체 통제(자립)하되, 그래픽저장장치(GPU) 확보나 일반 상용 거대언어모델(LLM)과 같이 효율이 중요한 영역은 글로벌 협력을 적극 활용(연계)하는 이원화 전략을 제시했다. 소버린 AI는 맹목적인 국산화가 아니라, 국가가 책임질 범위를 명확히 하는 전략적 선택이라는 것이다.
◆“특화 AI로 시작해 ‘제조 모델’ 선점해야”
산업 측면에선 한국의 독보적 강점인 제조업 데이터를 활용한 승부수가 제시됐다. 보고서는 범용 LLM 경쟁에 매몰되기보다 현장에서 즉각적인 가치를 창출하는 ‘버티컬(특화) AI’에 집중할 것을 제안했다. 버티컬 AI로 데이터를 축적하고, 이를 장기적으로 범용 역량으로 연결하는 경로를 설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제조 파운데이션 모델’을 한국이 선점할 수 있는 미개척지로 지목했다. 보고서는 물리·제조 기반 모델은 언어 모델과 달리 아직 지배적 표준이 없다고 판단했다. 이를 위해 개별 기업에 흩어진 데이터를 연결하는 ‘데이터 연합’을 구축하고, 현장 노동자의 노하우를 사회적 합의하에 데이터화하는 것이 범용 제조 AI 성공의 선결 과제로 꼽혔다.
◆“10만 양성론 허상…‘놀 수 있는 판’ 깔아줘야”
인재 정책에 대해서는 ‘숫자 중심’ 접근의 한계를 꼬집었다. 보고서는 “단순히 10만명을 양성한다는 식의 목표나 해외 석학을 모셔오는 방식으로는 한계가 명확하다”고 지적했다. 인재가 한국을 떠나는 이유는 연봉뿐만 아니라 성장할 수 있는 기회와 인프라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에 국가 차원에서 인재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거대 미션과 연구 인프라를 제공해 이들이 ‘머물고 성장하는 생태계’를 조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단순히 모델 연구자뿐만 아니라 시스템 최적화나 인프라를 다룰 수 있는 ‘실전형 인재’와 같이 구체적인 역할에 맞는 육성책이 시급하다고 덧붙였다.
◆“정부, 지원 넘어 최초 수요 창출해야”
마지막으로 보고서는 정부가 단순한 연구개발(R&D) 자금 지원자를 넘어 시장을 창출하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제언했다. 기업들이 불확실성 때문에 투자를 주저할 때, 공공 부문이 행정 자동화나 국방 시뮬레이션 등에 AI를 적극 도입하여 ‘최초 수요자’로서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최종현학술원 김유석 대표는 “지금 필요한 것은 속력보다 방향”이라며 “국가 차원의 목표와 책임 범위를 분명히 설정하는 것이 AI 주권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