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사회를 지배하는가’라는 질문은 호기심을 넘어 한 국가의 민주주의가 실질적으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가늠하는 잣대다. 다양한 주장이 있으나 학계의 시각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핵심 자원과 권력이 소수 집단에 집중되어 정책 전반을 좌우한다는 엘리트이론이고, 다른 하나는 다양한 이해집단이 경쟁하며 권력이 분산된다는 다원주의 이론이다.
겉으로 보면 한국 사회는 다원주의에 가까워 보인다. 선거는 치열하고, 언론과 시민단체도 활발히 목소리를 낸다. 정책을 둘러싼 논쟁도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모습만으로 권력의 작동 방식을 모두 설명할 수 있을까.
정치학자 바크라흐와 버래츠는 이 질문에 대해 흥미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이들이 말한 ‘무의사결정’(Non-decision making)이란 중요한 문제가 아예 논의 테이블에 오르지 못하는 현상을 뜻하며, 권력의 두 얼굴을 직시할 것을 요구한다. 표면적 얼굴이 공론장에서 벌어지는 투명한 경쟁과 협상이라면, 잠재적 얼굴은 특정 의제가 아예 정책화되지 못하도록 원천 봉쇄하는 보이지 않는 힘이다. 다시 말해, 기득권의 이해관계에 반하는 어떤 문제는 결정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선택지에서 제외된다.
부동산 정책을 떠올려 보자. 주거 불안과 자산 격차는 많은 시민에게 직접적인 고통을 주는 문제다. 그런데도 토지 소유 구조나 자산 축적 방식 자체를 바꾸는 근본적인 대안은 정책 논의의 중심에 서지 못해 왔다. 한국의 부동산 보유세 실효세율(약 0.16%)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약 0.5%)에 비해 낮은 수준이지만, 이를 조정하자는 논의는 종종 세금 폭탄이나 사유재산 침해라는 프레임에 가로막힌다. 대형 건설사, 금융 자본, 부동산 소유층의 이해관계는 시장 안정이라는 보편적 가치와 결합하여 개발이익 환수나 토지 소유 집중 규제 같은 근본적 논의를 비현실적인 것으로 치부하게 만들며, 결국 시민들은 대출 규제나 공급 확대 같은 제한된 선택지만을 강요받는다.
언론 문제도 비슷하다. 언론의 신뢰도 하락과 선정성 경쟁은 해마다 반복해서 지적된다. 그러나 광고 중심의 수익 구조나 대기업 광고 의존 문제를 근본적으로 바꾸자는 논의는 정책의 중심으로 잘 올라오지 않는다. 전체 매출의 상당 부분을 대기업 광고에 의존하는 언론 생태계 구조 속에서, 광고주의 이해관계를 건드리는 구조적 개혁안을 논의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것이다. 언론사의 편집권 독립이나 지배구조 개편을 핵심으로 한 법안이 오랫동안 국회를 넘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과정에서 권력은 노골적인 압력을 행사하기보다 현실적으로 어려운 문제라는 인식을 굳히는 방식으로 기존 질서를 유지한다.
무의사결정은 단순한 정책 실패가 아니다. 무엇이 문제인지, 어떤 해법이 가능한지를 미리 정해 버리는 보이지 않는 권력이 정책 과정에 작동하는 방식이다. 그건 원래 안 되는 일이라는 사회적 통념이 반복될수록, 시민들은 다른 가능성을 상상하기 어렵게 된다. 한국 민주주의의 한계는 시민이 참여하지 않아서라기보다, 참여하더라도 논의할 수 있는 의제의 폭이 이미 제한되어 있다는 데 있다.
결국, 민주주의의 성숙도를 따질 때는 무엇이 결정되었는지만 볼 것이 아니라 무엇이 애초에 선택지에 오르지 못했는지도 함께 물어야 한다. 겉으로는 치열한 다원주의적 경쟁이 벌어지는 듯 보이지만, 그 이면에서 잠재적 권력이 어떤 문제들을 조용히 배제하고 있는지 날카롭게 감시해야 하는 이유다.
오철호 숭실대 교수·행정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