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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모의 한국인 탈무드] 고구려 멸망과 지도자의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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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한·책임 넘기는 ‘승계’ 나라 운명 갈라
연개소문의 무책임한 결정 멸망 자초

“군자는 점치는 법을 배우지 않는다.”

세종 때 편찬된 ‘치평요람’은 수나라 양제의 고구려 원정을 비교적 상세히 전한다. 백만 대군을 동원했으나 을지문덕의 지략에 막혀 패퇴한 전쟁사 자체는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편찬자들의 관심은 전투의 승패가 아니라, 최고 권력자로서 양제가 결정의 순간마다 무엇을 놓쳤는가에 있었다.

박현모 세종국가경영연구원 원장

612년 요동성 전투가 그 대표적 사례다. 성 함락을 코앞에 두고 수나라 군은 마지막 총공격을 감행하지 않았다. 성안에서 항복 의사를 밝혔으나, 이는 당초 계획에 없던 변수였고, 현장 지휘관들은 황제의 재가 없이는 움직일 수 없었다. 회신을 기다리는 사이 성은 방어를 갖추었고, 결정적 기회는 사라졌다.

‘치평요람’에는 수양제가 점술가의 말을 듣고 전국의 이씨 성을 지닌 자들을 처형케 한 대목이 나온다. “이씨가 장차 천자가 된다”는 점괘 때문이었다.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었으나, 훗날 당 태종이 되는 이세민은 끝내 제거되지 않았다. 이 대목에서 편찬자들은 “군자는 점치는 법을 배우지 않는다”면서, 과연 나라의 흥망이 운수로 정해져 있는가[興亡有定數]라고 되묻는다. 흔히 ‘인생은 BCD’라고 말한다. 태어남(Birth)과 죽음(Death) 사이에서 어떤 선택(Choice)을 하느냐에 따라 삶의 궤적이 달라진다는 뜻이다. 수많은 선택 가운데에서도 특히 중요한 것이 마지막 승계다.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권한과 책임을 넘기는가에 따라 한 개인의 삶은 물론, 한 조직과 한 나라의 운명까지 갈라진다.

고구려의 멸망 과정은 지도자의 선택이 얼마나 결정적인가를 잘 보여준다. 666년 고구려의 실권자 연개소문이 죽은 후 그의 맏아들 연남생이 막리지가 되었으나, 연씨 형제들의 내분으로 국운은 급속히 기울었다. ‘치평요람’ 편찬자들이 특히 주목한 것은 축출된 연남생의 선택이다. 그는 아들을 당나라에 보내 군대를 요청했고, 그로써 당의 제2차 고구려 정벌이 시작되었다.

흥미로운 대목은 당나라 황제 고종과 시어사 가언충의 대화이다. 요동에서 돌아온 가언충에게 고종은 묻는다. “고구려가 이번에는 패망하리라고 그대는 어떻게 자신하는가?” 비록 요새 신성을 무너뜨렸고 설인귀가 맹활약하고 있지만, 아직 연남건이 압록강을 지키고 있었고, 혜성 출현으로 민심 또한 흉흉한 상황이었다.

이에 대해 가언충은 ‘수양제의 실패는 민심 이반 때문이었고, 당 태종의 정벌이 좌절된 까닭은 당시 고구려에 빈틈이 없었기 때문’인데,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고 대답했다. 그에 따르면, 고구려 국왕은 미약하고 권신이 전횡하며, 연개소문 사후 형제간 쟁탈전이 벌어졌는데, 결정적으로 연남생이 당에 귀부해 침입의 길잡이가 되었기 때문에 지금은 충분히 정벌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668년, 당은 신라와 연합해 평양성을 포위했고 고구려는 멸망했다. 안시성 전투의 승리로부터 불과 23년 뒤였다. 무엇이 국운을 이토록 급전직하로 기울게 했을까. 핵심은 연개소문의 리더십 승계 실패와 연남생의 외세 의존에 있다. 연개소문은 귀족 연합 정치를 무너뜨리고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킨 채, 그 구조를 감당할 준비가 되지 않은 장남에게 아무런 대비 없이 넘겼다. 그 결과 연남생의 이름 앞에는 ‘천년의 매국노’라는 낙인이 찍혔다. 연개소문의 무책임한 마무리와 연남생의 결정은 과연 운명이었을까. 역사는 그것을 운명이 아니라 사람의 선택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박현모 세종국가경영연구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