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부터 국제 뉴스의 헤드라인이 거칠다. 미국이 베네수엘라 수도를 급습해 현직 대통령 마두로를 압송했다. 덴마크령 그린란드는 대놓고 “사겠다”고 말한다. 거래가 거부되면 무력을 쓰겠다는 말도 서슴지 않는다. 힘의 논리가 전면에 등장한 국면이다.
본질은 도널드 트럼프라는 인물의 도덕적 가부가 아니다. “나를 멈출 수 있는 것은 국제법이 아니라 나의 도덕성뿐”이라는 그의 발언이 가리키는 지점이다. 이는 근대 문명이 오랜 시간 쌓아 올린 제도와 규범 위에 통치자의 의지를 군림시키겠다는 포고와 다름없다. 국가 간의 형식적 평등, 영토와 주권을 둘러싼 금기 등 전후 국제 질서를 떠받쳐온 전제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
한때 우리는 역사가 완성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믿었다. 1989년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언’을 통해 자유주의의 승리를 선언했다. 인류가 이념적 진화의 끝에 도달했으니 이제 보편적 규범 안에서 안정을 누릴 일만 남았다는 낙관이었다. 그러나 2026년의 현실은 ‘역사의 완성’이 아닌 ‘역사의 역습’에 가깝다. 격렬한 성장을 지나 성숙기에 들어선 줄 알았던 세계는 다시 질풍노도의 불확실성 속으로 거칠게 회귀하고 있다.
‘역사의 종언’이 떠난 자리에는 ‘호모 사피엔스의 종언’이라는 더 근원적인 질문이 들어섰다. 인공지능(AI)은 인류가 자명하게 여겨온 전제들을 근본적으로 해체하고 있다. 일론 머스크는 최근 대담에서 2026년 범용 인공지능(AGI)의 등장을, 2030년에는 전 인류의 지능을 합친 것보다 월등한 초지능의 탄생을 예고했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인간보다 뛰어난 타자’와 마주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지능의 폭발은 노동 시장의 지형을 완전히 뒤바꿀 것이다.
이 지점에서 머스크가 내놓은 시나리오는 꽤 달콤하다. AI와 로봇이 생산성을 비약적으로 높여 상품과 서비스의 한계비용이 제로에 수렴하면 모든 물자가 넘쳐나게 된다. 로봇이 생산을 전담하고 인간은 오로지 소비하며, 정부가 수요 창출을 위해 국민에게 돈을 분배하는 구조다. 인류는 보편적 기본소득(UBI)을 넘어 보편적 고소득(UHI, Universal High Income)의 단계에 이르고, 노동은 고단한 의무가 아닌 취미가 된다는 설계다.
결핍이 아닌 풍요가 기본값인 사회. 이보다 매혹적인 약속이 또 있을까. 하지만 이 ‘풍요의 예언자’가 불과 1년 전 정부효율부(DOGE) 수장으로서 단행한 대규모 감원을 떠올리면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머스크가 말한 낙원은 ‘대량 실직’이라는 가혹한 연옥을 통과한 뒤에야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낼 모양이다.
현재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등 빅테크 공룡들은 사상 최대의 매출과 이익을 경신하면서도, 동시에 수만 명 단위의 해고를 단행하고 있다. 깎아낸 인건비는 고스란히 AI 인프라 구축을 위한 재원이 된다. 사람을 팔아 GPU를 사고 있는 형국이다. 고용 유연성이 낮은 한국 정보기술(IT) 업계는 신규 채용의 문을 닫는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다. 네이버와 카카오의 20대 인력 비중이 급락하며 ‘판교의 고령화’는 이미 현실이 됐다. 주니어 개발자의 업무를 AI가 넘겨받기 시작했고, 로펌·회계법인에서도 신입의 역할이 희미해졌다. 이제는 “의대 갈 필요 없다”는 말까지 나온다.
과거 자동차가 등장했을 때 마부는 운전을 배워 운전사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말은 자동차와의 경쟁에서 영원히 퇴출당했다. 과거의 기술 혁명이 마부가 운전사로 전업하는 과정이었다면, AI의 진격은 말 앞에 나타난 자동차와 같다는 비유가 서늘하다. 아무리 애써도 말은 자동차가 될 수 없다. 인류는 과연 노동에서 해방되어 초원을 달리는 말이 될 것인가, 쓰임을 다해 도축되는 말이 될 것인가.
지식 노동마저 기계에 의해 대체되는 현실 앞에서 인간은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했다. “인간의 쓸모는 어디에 있는가?” 석학들이 예고한 ‘무용(無用) 계급’의 탄생은 이제 가설을 넘어 실존적 공포로 다가왔다. AI가 AI를 설계하는 시대, ‘노동하는 인간’이라는 전제는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인류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하는 생경한 질문 앞에 서 있다.
지금 우리는 이제 막 걸음마를 뗀 낯선 지성과 구시대의 유령 같은 영토 야욕이 공존하는 기괴한 풍경 속을 걷고 있다. 하나는 전후 질서를 뒤흔드는 세계사적 격동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 사회의 작동 원리를 바꾸는 인류사적 격동이다. 전자가 규칙의 붕괴라면 후자는 전제의 붕괴다. 두 힘이 서로를 강화하며 동시에 진행 중이다.
두 파고는 결코 별개의 사건이 아니다. AI 혁명이 인류 최대의 난제를 던진 지금,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결정들을 내려야만 한다. 그러나 세계는 고도의 연대와 숙고 대신 각자도생의 정글로 흩어지며 권위주의적 소수의 의지에 스스로를 맡기고 있다. 가장 정교한 지능의 탄생과 가장 거친 힘의 통치가 맞물린 불협화음 속에서, 진짜 위기는 답을 찾아야 할 결정적인 순간에 우리가 길을 잃고 있다는 점이다.
김동기 국가미래연구원 연구위원 전 KBS P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