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남자 피겨스케이팅 간판 차준환(25·서울시청)은 2025∼2026시즌 들어 힘든 시기를 보내야 했다. 고질적인 발목 부상과 더불어 스케이트 부츠가 발에 맞지 않아 고전해왔다. 3개월 동안 거의 일주일에 한 번씩 스케이트를 교체하는 등 12개 이상의 부츠를 착용하면서 맞는 스케이트를 찾느라 고생했다. 이로 인해 4일 끝난 제80회 전국남녀 피겨스케이팅 종합선수권대회에서도 그는 평소보다 점프 난이도를 낮춰 경기에 임했을 정도다.
하지만 차준환은 이 대회에서 우승하며 한국 남자 피겨 사상 최초로 3회 연속 올림픽 본선 진출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부츠 문제도 어느 정도 수습됐다. 따라서 마지막 올림픽 도전이 될 가능성이 높은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을 한 달 앞두고 거대한 도박에 나섰다. 단순히 기량을 점검하는 수준을 넘어, 자신의 연기 인생을 집대성할 프리스케이팅 프로그램을 전격 교체하는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차준환은 최근 올림픽 시즌 프리스케이팅 곡으로 준비해온 영화 ‘물랑루즈’ 오리지널 사운드트랙(OST) 메들리 대신,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정열적인 탱고 곡 ‘미치광이를 위한 발라드’(Balada para un loco)로 프로그램을 변경했다.
시즌 도중, 그것도 올림픽이라는 대업을 목전에 두고 프로그램을 바꾸는 것은 피겨 스케이팅에서 매우 이례적이다. 그만큼 위험 부담이 큰 결정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안무와 동선에 익숙해지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며, 기술적 요소와의 결합을 최적화하는 과정에서 자칫 밸런스가 무너질 수 있다.
그럼에도 차준환이 이 같은 선택을 한 이유는 ‘예술적 완성도’와 ‘심리적 일체감’에 있다. ‘미치광이를 위한 발라드’는 그가 2024∼2025시즌에 사용하며 세계선수권 등 주요 대회에서 호평받았던 곡이다. 차준환 특유의 섬세한 표현력과 강렬한 카리스마가 가장 잘 드러나는 곡으로 꼽힌다. 올림픽이라는 극한의 중압감 속에서 본인이 가장 자신 있게, 그리고 가장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는 옷으로 갈아입은 셈이다.
피겨 전문가들은 “차준환은 기술적인 안정감 못지않게 프로그램의 서사와 예술성을 중시하는 선수”라며 “새로운 곡보다 익숙하면서도 자신의 강점을 극대화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선택함으로써, 예술 점수(PCS)에서의 우위를 점하고 심리적 안정감을 얻으려는 전략적 판단”이라고 분석했다.
차준환도 “부츠 문제로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적응을 마쳤다”며 “올림픽에서는 내가 가진 최고의 기술 구성을 다시 복구할 것”이라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밀라노 올림픽에서 차준환이 메달권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프리스케이팅에서 쿼드러플(4회전) 점프의 성공률이 절대적이다. 현재 남자 피겨계는 ‘쿼드러플 신’으로 불리는 일리아 말리닌(미국)을 필두로 4회전 점프가 기본 사양인 시대다. 차준환이 자신의 주무기인 쿼드러플 살코와 쿼드러플 토루프를 프로그램 바뀐 안무 속에 얼마나 완벽하게 녹여내느냐가 관건이 될 전망이다.
차준환의 바뀐 프로그램은 21일부터 25일까지 중국 베이징에서 열리는 2026 국제빙상경기연맹(ISU) 4대륙 피겨 선수권대회에서 첫선을 보인다. 이번 대회는 올림픽 개막을 불과 2주 앞두고 열려 ‘전초전’ 성격이 강하다. 차준환에게는 밀라노로 가기 전 실전 감각을 조율할 마지막 기회다. 특히 일본의 유마 가기야마, 가오 미우라 등 올림픽 무대에서 직접 맞붙을 라이벌들이 대거 출전할 예정이어서 미리 점수대를 확인하고 심판들의 피드백을 받을 수 있는 소중한 무대다. 차준환은 베이징에서 바뀐 프리스케이팅 프로그램의 완성도를 점검하고, 부츠 적응 상태를 최종 확인하며 메달 획득을 위한 ‘모의고사’를 치른다는 계획이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15위로 가능성을 보였고,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에서 5위에 오르며 한국 남자 피겨의 위상을 드높였던 차준환. 이제 20대 중반의 노련한 선수가 됐다. 현재 남자 싱글은 절대 강자 말리닌과 일본의 견고한 상위권 선수들이 포진해 있어 메달권 진입 장벽이 매우 높다. 그러나 차준환은 독보적인 예술성과 스케이팅 스킬, 그리고 큰 무대에서의 풍부한 경험을 갖추고 있다. 만약 4회전 점프를 포함한 기술적 요소를 ‘클린’으로 수행한다면, 바뀐 프로그램의 예술적 감동과 시너지를 일으켜 충분히 시상대 위에 설 수 있다는 평가다.
차준환은 “이번 올림픽에선 나다운 연기력을 펼치고 싶다”며 “4년 전 베이징 올림픽 때보다 성장한 모습을 보여드릴 것”이라고 각오를 다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