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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고데모조차 없는 사회 [종교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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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재판을 떠올릴 때 우리는 흔히 빌라도와 군중을 기억한다. 권력을 쥔 채 책임을 회피한 총독, 그리고 선동에 휩쓸린 사람들. 그러나 복음서는 그 사이에 한 인물을 조용히 세워 둔다. 니고데모다. 그는 예수를 따르지도, 공개적으로 반대하지도 않았다. 다만 한 번, 단 한 번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기 전에 심판하느냐”고 물었을 뿐이다. 그 질문은 무죄 선언도, 신앙 고백도 아니었다. 오직 절차에 대한 요구였다.

 

니고데모는 유대인 중에서도 율법을 존중했던 바리새인이었고, 유대 최고 의결기구인 산헤드린의 구성원이었다. 체제의 한복판에 있던 엘리트이기도 했다. 그는 밤에 예수를 찾아갔지만, 공개적으로 예수를 변호할 용기는 없었다. 예수 재판 국면에서 그가 한 말은 단 한 문장이었다. 그러나 그 질문은 즉각 낙인으로 되돌아왔다. “너도 갈릴리 사람이냐.” 논박이 아니라 조롱에 가까운 야유였다. 니고데모는 더 말하지 못했고, 재판은 그 자리에서 이미 방향을 잃은 채 진행됐다. 그럼에도 이 인물은 중요하다. 그는 예수를 구해내지 못했지만, 질문을 남겼다. 그 질문 덕분에 훗날 기독교는 예수의 십자가가 구원의 사건임을 말하면서도 동시에 그 재판이 역사적·윤리적으로 부당했음을 고백할 수 있었다. 질문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오늘이다. 지금 우리 사회를 둘러싼 특정 종교 집단에 대한 재판과 담론을 보면 예수 재판의 장면이 자꾸 겹쳐 보인다. 개별적 위법 행위의 유무를 차분히 따지기보다 ‘사이비·이단’이라는 정체성 프레임이 먼저 작동한다. 범죄보다 존재가 문제시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대중은 사안을 판단하기보다 이미 규정된 인식을 따라가도록 유도된다. 이는 설득이라기보다 현실 인식을 특정 방향으로 고정시키는 일종의 집단적 가스라이팅에 가깝다. 

 

이 순간 재판은 처벌의 과정에서 제거의 절차로 변질된다. 정치 권력은 말한다. “사법적 판단에 맡기겠다”, “사회적 요구가 크다”, “종교계도 해산을 원한다.” 빌라도의 “너희가 어떻게 하기를 원하느냐”는 무책임과 다르지 않다. 판단을 유보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여론이 원하는 방향으로 길을 터주는 방식이다. 

 

이 때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적극적 가해자보다 침묵하는 엘리트들이다. 많은 법학자들은 이 사안이 법의 문제라기보다 이미 정서의 문제로 변질됐음을 안다. 많은 종교지도자들 역시 종교 해산이라는 극단적 조치가 헌법적 가치와 충돌할 수 있다는 점을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대부분은 말하지 않는다. 이유는 단순하다. 말하는 순간 ‘같은 편’으로 낙인찍힐 위험, 도덕적 공격을 감수해야 할 비용 때문이다.

 

니고데모는 적어도 질문했다. “절차는 지켜졌는가.” 니고데모는 기독교의 인물이 아니다. 권력이 결론을 앞세울 때 절차를 묻도록 문명이 남겨 둔 이름이다. 

 

오늘 우리는 그 질문조차 듣기 어려운 사회에 살고 있다. 특정 종교 집단, 이를테면 통일교의 경우처럼 당사자들은 이미 발언권을 박탈당했고, 그들의 말은 자동으로 ‘자기변명’으로 처리된다. 변호하려는 이들은 ‘옹호자’로 낙인찍히고, 그 침묵 위에서 법의 형식만 남은 재판이 굴러간다. 

 

정성수 종교전문기자

지금 거론되는 종교는 한국에서 시작돼 세계로 확산된 종교다. 만약 그것이 종주국에서 제도적으로 해산의 길을 걷는다면, 그것은 해당 종교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그 사회의 종교 자유와 법치 성숙도 전체가 역사 앞에 심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더구나 2000년 전 고대와 달리, 오늘날 민주주의 사회는 종교의 자유를 그 성립의 전제로 삼아왔다. 그런데 종교를 해산하는 과정에서 최소한의 절차적 문제 제기조차 없었다면, 훗날 한국 사회는 역사 앞에서 무엇이라 답할 것인가.

 

기독교는 이 지점에서 더 무거운 책임을 마주하게 된다. 예수의 십자가는 신학적으로 구원의 사건일 수 있으나, 그에 이르는 단죄와 처형은 역사적·윤리적으로 명백한 사법 살인이었다. 정통 기독교 신학 역시 이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많은 신앙 담론은 “결과적으로 선했으니 과정은 문제 삼지 않아도 된다”는 위험한 혼합으로 흘러왔다. 이 인식은 오늘 반복되는 유사한 구조 앞에서도 쉽게 눈을 감게 만든다. 대상만 바뀌었을 뿐, 프레임과 침묵, 책임 회피의 구조는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니고데모는 체제를 멈추지 못했으나 질문 하나를 남겼다. 질문마저 사라진 사회는 무엇으로 자신을 방어할 것인가. 적어도 누군가는 물어야 한다. “이 판단은 정당한가.” 니고데모조차 나오지 못하는 사회는 정상적이라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