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텔레비전을 보면 개인의 사적인 이야기를 다루는 프로그램이 많다. 출연자는 자신의 가장 내밀한 고민을 털어놓고, 진행자는 조심스러운 질문을 던지며, 전문가는 분석과 조언을 더한다. 부부 갈등, 가족 간의 상처, 트라우마, 중독, 과거의 실패와 후회까지 그 소재도 실로 다양하다. 과거라면 가까운 이에게조차 털어놓기 어려웠을 이야기들이 이제는 대중 앞에서 ‘상담’이라는 이름으로 펼쳐진다. 그러나 이 장면을 바라보는 시청자의 위치는 치료자도, 조력자도 아닌 타인의 비밀을 즐기는 관객에 가깝다.
이러한 프로그램이 갑자기 등장한 것은 아니다. 이미 수년 전부터 예능, 교양, 다큐멘터리의 경계는 흐려졌고, 개인의 사생활은 콘텐츠의 중심으로 이동해 왔다. 다만 최근 들어 눈에 띄게 달라진 점은 ‘은밀함’의 수위다. 이제는 단순한 일상 공개를 넘어, 개인의 고통과 상처 그 자체가 서사의 핵심이 된다. 왜 우리는 이런 장면을 계속해서 소비하게 되는 것일까. 그리고 왜 방송은 이를 멈추지 않는 것일까.
정신의학적으로 보면 타인의 고통에 대한 관심은 인간의 보편적 속성에 가깝다. 이러한 현상은 미국 사회심리학자 레온 페스팅거가 주창한 ‘사회비교이론’으로 설명된다. 나보다 더 힘들어 보이는 타인의 상황을 보며 “그래도 나는 저 정도는 아니다”라고 느끼는 순간, 불안은 일시적으로 낮아지고 자존감은 방어된다는 ‘하향 비교(Downward Comparison)’ 기제다. 이는 결코 특별히 잔인한 심성 때문이 아니다. 불확실성과 경쟁이 일상이 된 사회에서, 비교는 자신을 지탱하는 가장 손쉬운 심리적 방어 기제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감정의 대리 경험’이라는 요소가 더해진다. 직접 겪기에는 너무 고통스럽거나 위험한 감정을 타인의 이야기라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경험하는 것이다. 뇌과학적으로 보면 이때 공감 회로와 보상 회로가 동시에 활성화된다. 슬픔, 분노, 연민 같은 감정은 편도체와 전대상피질을 자극하고, 이야기가 갈등 해소 국면으로 접어들 때 도파민 분비가 뒤따른다. 이러한 긴장과 이완의 반복 구조는 상담의 형식을 빌리고 있으나, 본질은 드라마에 가깝다.
출연자에게 있어 이 경험은 양가적이다. 단기적으로는 이해받는 느낌, 말함으로써 얻는 해방감, 사회적 지지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필연적인 부작용이 뒤따른다. 한번 공개된 고통은 주워 담을 수 없다. 복잡한 맥락은 편집에 의해 축약되고, 인물은 특정 이미지로 고착된다. “문제 있는 사람”, “불행한 사연의 주인공”이라는 프레임은 방송 이후의 삶에도 낙인처럼 따라다닐 수 있다. 사후 후회, 수치심, 관계의 변화는 결코 가볍지 않은 대가다. 더 큰 문제는 이 모든 과정이 ‘치유’라는 언어로 정당화된다는 점이다.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상담가, 변호사 등 전문가가 등장하는 순간, 프로그램은 도덕적 면죄부를 얻는다. 시청자는 더 이상 관음자가 아니라 ‘공감하는 시민’의 위치에 서게 된다.
또한 ‘드러내야 치유된다’는 명제가 어느새 당연한 전제가 되어버린 사회적 기류도 문제다. 고통을 말하지 않으면 회피하는 것이고, 공개하지 않으면 솔직하지 못한 것처럼 비친다. 그 결과 침묵할 권리, 스스로 감정을 정리할 시간과 경계를 설정할 권리는 점점 약화된다. 고통을 표현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름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오직 ‘폭로와 전시’라는 하나의 방식만을 정상으로 강요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타인의 고통을 반복적으로 소비하는 문화는 결국 우리의 감각을 마비시킨다. 처음에는 연민이었던 감정이 점차 피로로 변하고, 끝내 무감각해진다. 더 자극적인 사연, 더 극적인 고백이 아니면 반응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공감의 깊이는 얕아지고, 치유는 긴 과정이 아닌 한순간의 ‘장면’으로 오해된다. 우리는 고통을 진심으로 이해하는 대신, 그것을 평가하고 구경하는 데 익숙해지고 있다.
우리는 정말 치유를 위해 이 프로그램을 보고 있는가. 아니면 타인의 불행을 거울삼아 안전한 관객석에서 안도하고 싶은 것인가. 공감의 이름으로 소비되는 고통은 사회 전체의 책임을 흐린다. 타인의 상처를 흥미 위주로 들여다보는 데 익숙해진 사회가 끝내 외면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우리 모두가 함께 짊어져야 할 구조적 고통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권준수 한양대 의대 정신건강의학교실 석좌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