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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서 살고 싶을 뿐인데…” 버티기엔 ‘팍팍’ 남자니 ‘막막’ [창간37-모두의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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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소멸 최전선’ 군산·의성·횡성에서 만난 청년들

하루 10시간 일해도 월급 200만원대
서울 간 친구들 승진·연봉소식 박탈감
“지금이라도 수도권 갈까 매일 고민”

연애·결혼·집까지 내려놓은 ‘오포세대’
고위직 정착·로컬 창업 선례 있지만
메리트 없는 생활 인프라에 이탈 가속
양질의 일자리 등 정주여건 개선 시급

“잘살고 싶은 건 아니에요. 남들처럼 평범하게만 살고 싶은데, 지방에서는 그게 마음처럼 안 됩니다.”

지난달 30일 전북 군산 산업단지의 아침은 여느 때처럼 분주했다. 출근 차량이 줄지어 공장 앞을 지나갔지만, 30대 초반 김모씨의 표정은 어두웠다. 4년 동안 공무원 등 여러 시험을 준비하다 뜻을 접고 들어간 지역 중소기업. 부모와 함께 생활하기에 200만원대 월급으로도 버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예상보다 훨씬 팍팍했다. 수도권에 있는 친구들이 “연봉이 억대를 넘겼다”는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그는 한참을 말없이 앉아 있었다. 결국 입사 2년 만인 지난해 말 사직서를 냈다. 다시 취업 준비생이 된 그는 “지방 중소기업에 발을 들이면 평생 그 수준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말이 왜 나오는지 알겠더라”라며 도서관으로 향했다.

군산의 청년인구는 2024년 기준 5만6000명 남짓으로 전체 인구의 21.7%를 차지하지만 고용률은 59.6%, 주택소유자는 7300여명에 불과하다. 이들의 41.5%가 월평균 200만∼300만원의 임금을 받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그해에만 직장을 찾아 떠나는 청년이 940명이나 됐다.

경북 의성군에서 만난 이모(30대)씨는 “친구들은 다 대도시에서 취업하고 집 사고 결혼도 하는 것 같은데, 나만 3등 시민이 된 기분”이라고 말했다. 대학 졸업 후 고향의 작은 제조업체에 취직해 하루 10시간 넘게 일하지만, 세후 월급은 230만∼240만원 선이다. 아버지가 지인을 통해 어렵게 알아봐 준 일자리였다. 방학을 맞아 고향에 내려왔다는 대학생 유모(28)씨는 “고향에서 살고 싶어도 번듯한 직장은 사실상 공무원밖에 없다”며 “의성에서 일자리를 찾아 타지로 가는 건 너무 당연한 선택”이라고 말했다.

의성군의 청년 인구는 4761명. 전체 인구의 10%가 채 되지 않는다. 점심 무렵 의성읍 거리를 걸었지만, 카페나 식당에서 청년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청년 감소는 학교 통폐합과 교통 노선 축소, 상권 붕괴로 이어지며 지역의 일상 기반 자체를 흔들고 있다.

산단과 대학이 있는 도시도 크게 다르지 않다. 경북 영천의 한 제조기업은 입사 3년 차 기준 이직률이 30%에 달한다. 경북 전체 청년 인구는 1년 새 3% 이상 줄었고, 포항·구미·경주 같은 주요 도시에서도 감소세가 뚜렷하다. 군 지역에서는 5년 새 청년의 30% 이상이 사라졌다.

강원 횡성군에서 직장을 다니는 최모(30대)씨는 “지금이라도 수도권으로 떠나야 할지 매일 고민한다”고 말했다. 그는 “좁은 지역사회 특성상 학연·지연·혈연이 업무에 영향을 미칠 때가 많다”며 “규정대로 일하려 하면 인맥을 타고 청탁이나 압박이 들어온다”고 털어놨다. 이어 “이런 데 지친 친구들은 모두 수도권으로 떠나 나도 남아 있는 게 맞나 싶지만, 다시 공부할 자신이 없다”고 했다.

춘천시에서 창업했다가 한 차례 쓴맛을 본 20대 이모씨는 지역사회가 새로운 시도를 기피한다고 생각한다. 현재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다는 이씨는 “지역은 새로운 시도에 대한 흡수가 굉장히 느림을 느꼈다”며 “처음부터 서울에서 창업했다면 성공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강원 지역 청년들의 수도권 이동은 해마다 증가하는 추세다. 국가데이터처에 따르면 19∼34세 청년층이 수도권으로 순이동한 수는 2022년 2584명, 2023년 4191명, 2024년 4508명이다. 강원연구원이 2024년 수도권으로 이동한 청년들을 대상으로 사유를 조사한 결과, 가장 많은 이가 ‘직업’을 꼽았다.

군산에서, 의성에서, 횡성에서 만난 청년들의 하루는 놀라울 만큼 닮아 있었다. 어렵게 일자리를 구해 아침 일찍 출근하지만 미래를 그리기엔 월급이 빠듯하다. 고향을 떠나자니 집값과 생활비를 감당하기 어렵고, 남자니 ‘다음 단계’가 잘 보이지 않는다. 연애·결혼·출산을 포기한 삼포 세대를 넘어 집과 취업까지 내려놓은 ‘오포 세대’라는 말이 더 이상 과장이 아니다.

그럼에도 모든 청년이 무기력에 빠진 것은 아니다. 군산의 한 중소기업에 다니는 고모(31)씨는 박사학위를 받고 연구원으로 입사해 팀장을 거쳐 6년 만에 본부장까지 올랐다. 그는 “입사 이후 회사를 떠난 청년만 해도 20∼30명은 봤다”며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쏟아지는 억대 연봉 이야기에서 받은 박탈감이 컸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그는 “회사와 함께 성장하고, 지역에서도 커리어를 만들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며 현재의 선택에 만족하고 있다고 했다.

또 다른 길도 있다. 경북 안동에서 로컬 창업을 택한 황상문(36)씨는 유품 정리와 빈집 정리 사업으로 고향에 머물 이유를 만들었다. 그는 “내가 잘할 수 있고, 지역에 필요한 일을 찾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강원 양구군에 본사를 둔 정보통신기술 업체 아이캠 이현상(33) 전무이사도 지역에서 희망을 찾고 있다. 그는 “사업 초기 조달청 나라장터에 물품을 등록하려는데 디자인 비용이 부담됐지만 군청에서 절반을 지원해 줘 숨통이 트였다”며 “원재료를 들여오는 물류비 등 실질적인 지원이 있었기에 새로운 시장을 개척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지자체도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의성군은 지역 소멸 위기에 정주 여건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고 청년이 돌아와 머무르기 좋은 도시로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지역 산업계 일각에서는 ‘MZ세대의 책임 회피 성향’ 때문이라는 시각도 팽배하다. 군산의 한 기업체 인사 담당자는 “낮은 임금과 불안정한 미래 속에서 책임이 따르는 직장보다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아르바이트나 잠시 일하고 실업급여를 택하는 경향이 크다”고 진단했다.

하지만 현장에서 만난 청년들은 젊은층의 수도권 러시가 개인 성향으로 치부하기엔 구조적인 문제에서 비롯한다고 입을 모았다. 즉 양질의 일자리와 생활 안정, 성장 경로가 보이는 산업 생태계, 문화·교육 기반이 함께 갖춰지지 않는다면 지방 소멸은 더 빨라질 수밖에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일치된 의견이다. 지방 소멸의 가장 아픈 얼굴은 오늘도 출근길에서 “이번 생은 평범하게 살기 힘들 것 같다”고 말하는 청년들이다. 이들이 다시 미래를 상상할 수 있도록 하는 토대를 만드는 일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