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델 카스트로 AND 체 게바라/ 사이먼 리드헨리/ 유수아 옮김/ 21세기북스/ 3만9800원
쿠바혁명의 전설로 불리는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 두 혁명가의 우정과 혁명을 다룬 책이다. 반세기 이상 사회주의 국가 쿠바를 이끌었던 카스트로. 그의 혁명 동지이자, 이 시대 저항 운동의 상징이 된 게바라. 두 혁명가 개인에 대해서는 그간 다양한 기록물이 있었지만 12년을 함께 한 둘의 관계에 대해서는 제대로 조명된 적이 없어 이채롭다. 저자 사이먼 리드헨리 런던대 교수는 아바나와 워싱턴, 모스크바, 마이애미, 프린스턴, 보스턴, 런던에서 모은 기밀문서와 두 혁명가와 관련된 주요 인물을 인터뷰해 두 인물의 야망과 갈등, 이어줬던 신념 등 두 인물의 모든 것을 담았다.
카스트로는 쿠바 아바나대학 법대 시절부터 이미 끊임없이 사건을 찾아다니는 행동가였다. 20대 초반이었던 1947년에는 대중을 선동하기 위해 쿠바 독립의 상징, ‘데마하과의 종’을 절도하는 정치극을 벌여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졸업 후 가난한 이들을 위한 변호사로 활동하며 정치적 야망을 키우던 그는 1952년 바티스타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자 합법 투쟁의 한계를 깨닫고 무장봉기를 결심한다. 다음 해인 1953년 7월 26일에는 훗날 7·26 운동이라 불릴 몬카다병영 습격을 이끌었으나 참혹하게 실패했다. 이때 “역사가 나를 사면할 것이다”라는 길이 남을 말을 남긴 뒤 15년 형을 선고받는다. 독방에서 마르크스, 레닌, 문학 고전을 탐독하며 동지 조직을 재정비하는 시간을 거쳐, 1955년 5월 석방됐으나 암살 위협을 피해 멕시코로 망명한다.
‘체’로 불리기 이전의 에르네스토 게바라는 사색가였다. 그는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게바라는 대화 중에 상대를 부르거나 말을 잇기 위해 ‘체’(che)라는 감탄사를 쓰면서 ‘체’라는 별명을 얻었다. 정치에 무관심하고 내성적인 지식인의 전형이었으나, 그를 바꾼 것은 친구와 1952년에 떠난 오토바이 여행이었다. 의사 면허증을 취득한 후 1953년에 다시 떠난 여행에서 체는 페루 혁명가와 쿠바의 7·26 운동 망명자들을 만나 혁명가로서 발아하기 시작한다. 1954년 아르헨티나의 아르벤스 좌파 정권 붕괴를 결정적 계기 삼아 ‘혁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소총을 들어야 한다’는 신념을 갖추게 된다. 이때 혼란을 피해 옮겨 간 멕시코에서 역사적인 카스트로와 만남이 시작된다. 변호사 출신의 카스트로, 천식에 시달리던 아르헨티나 의사 게바라. 출신도, 말투도, 혁명을 대하는 태도도 달랐던 두 사람은 바티스타 독재를 무너뜨린다는 목표 하나로 묶인다.
멕시코 연방보안경찰에 의해 둘의 조직이 체포됐을 당시의 묘사는 두 사람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수감된 카스트로는 정치적 후유증을 우려해 조직이 공산주의와 무관함을 강변해야 했으나, 게바라는 심문 과정에서 마르크스주의적 신념을 당당히 밝혔다. 이 때문에 게바라의 석방이 지연되고 전체 계획이 위험해지게 된다. 하지만 카스트로는 게바라를 계획에서 배제하라는 주변의 권고를 무시했다. 그는 “나는 그를 버리고 떠나지 않는다”는 태도를 고수하며 게바라가 석방될 때까지 기다렸다. 이 사건을 계기로 두 사람은 서로의 차이를 확인했으나, 존경심과 신뢰는 더욱 깊어졌다. 그리고 게바라는 카스트로에게 인생을 걸기로 결심했다. 저자는 이 시기의 장면을 마치 영화처럼 복원한다. 밤마다 이어지던 토론, 총알보다 부족했던 식량, 게바라가 보여준 냉혹한 결단과 카스트로의 끝없는 연설. 혁명은 영웅 서사가 아니라 지독하게 피곤한 일상의 연속이었음을 보여준다.
혁명이 성공한 후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1959년 아바나에 혁명의 깃발이 꽂히는 순간, 두 사람의 관계는 달라진다. 카스트로는 남는다. 국정을 책임지고, 국제정치의 냉혹한 계산으로 들어간다. 미국과 맞서기 위해 소련과 손을 잡고, 이상보다 생존을 택했다. 게바라는 달랐다. 그는 권력의 자리에 오래 머무르지 못한다. 산업장관과 중앙은행 총재를 맡았지만, 회의실과 보고서 속에서 숨이 막힌다. 그러던 중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는 두 사람의 관계와 세계관에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니키타 흐루소프가 쿠바와 상의 없이 미사일 철수를 결정하자, 카스트로와 게바라는 모두 격분하며 소련에 배신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후 둘의 진로는 달랐다. 이 사건을 계기로 카스트로는 더욱 실용주의적이고 유연하게 현실에 적응하며 소련의 권위를 인정하는 쪽으로 선회했다. 반면, 게바라는 더욱 교조적이고 단호해졌다. 소련이 제국주의의 공범일 수 있다는 회의감을 갖게 된다. 1965년 알제리 연설에서 소련을 포함한 사회주의 국가들이 저개발국가를 착취한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이는 소련의 지원이 절실했던 카스트로를 곤혹스럽게 했고, 게바라가 쿠바 정부 요직에서 물러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그럼에도 둘의 우정은 견고했다. 이는 게바라의 사후 카스트로의 극진한 예우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카스트로는 게바라가 1967년 10월 볼리비아 정부군에 사살된 것을 믿지 않으려 했으나, 증거가 명확해지자 10월 15일 텔레비전 연설을 통해 공식적으로 이를 확인했다. 카스트로는 “이 쓰디쓴 과업을 이어갈 것”이라고 선언하며, 죽음을 패배가 아닌 영웅적 순교로 승화시켰다. 게바라가 남긴 볼리비아 일기를 출판하고, 알베르토 코르다가 찍은 베레모를 쓰고 먼 곳을 응시하는 모습을 혁명의 상징으로 내세웠다. 이를 통해 카스트로는 게바라를 쿠바혁명의 영원한 아이콘으로 박제했다. 카스트로는 게바라에게서 ‘희생과 노고’라는 혁명적 삶의 원형을 보았고, 게바라는 카스트로를 통해 자신의 이상을 현실 정치에 구현했다. 게바라의 죽음으로 두 사람의 운명 공동체는 빛을 잃었지만, 역설적으로 그들의 파트너십은 20세기 가장 강력한 혁명의 상징으로 남게 된다.
게바라가 떠난 후 40년 넘게 홀로 집권한 카스트로는 노년 인터뷰에서 “나는 체에 대해 많이 꿈꿉니다. 그가 살아서 군복을 입고 있는 모습을 꿈꿉니다”라고 고백한다. 죽음조차 갈라놓지 못한 깊은 그리움과 유대를 드러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