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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호섭의전쟁이야기] 강한 군대는 왜 공화국을 지키지 못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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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 당시 독일군은 군사 효율성의 측면에서 20세기 최고의 군대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다. 그렇다면 1차대전 패전 이후, 베르사유 체제 아래에서 중화기·전차·항공기 보유가 금지되고 병력도 10만명으로 제한된, 사실상 무늬만 군대에 불과했던 독일군은 어떻게 불과 20여년 만에 강력한 전쟁 기계로 재탄생할 수 있었을까? 그 중심에는 전간기 바이마르 공화국 군대를 이끌었던 젝트가 있었다.

젝트는 독일 국방방위군(라이히스베어)을 소수 정예의 핵심 ‘골격군’으로 체질 개선했다. 장교와 부사관은 전투 중 지휘 공백이 발생할 경우, 하급자가 차상급자의 임무까지 대행할 수 있도록 훈련받았다. 또한 변화하는 환경에서 상급자의 지시를 기다리기보다는 그 의도를 이해한 상태에서 스스로 결단하고 행동하는 임무형 지휘가 군 전체의 기본 지휘 원칙으로 자리 잡았다. 이로써 독일군은 평시에는 소수 병력으로 유지되면서도, 병력이 확대되더라도 지휘와 운용을 원활하게 할 수 있는 확장 가능한 군대로 기능할 수 있게 되었다.

한스 폰 젝트

여기에 젝트는 기동전 중심의 싸우는 방식을 정착시켰다. 참호에 고착되어 시간을 소모하지 않고, 항상 움직이며 주도권을 유지하는 방식이 강조되었다. 이는 야외 기동훈련과 젝트의 직접 검열을 통해 체화되었으며, 소련과의 비밀 군사협력을 통해 전차와 항공 운용을 훈련하는 현실적 경험을 통해 보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젝트의 군대개혁에는 정치적 한계도 존재했다. 그는 군이 정권 교체와 정파 갈등에 휘말려 내전적 상황으로 치닫는 것을 막기 위해, 군이 정당정치에 개입하지 않아야 한다는 중립성 원칙을 강조했다. 문제는 이 정치적 중립이 위기 상황에서 헌정 질서를 적극적으로 수호하는 원칙으로까지 발전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그 결과 군은 합법 정부와 반헌정 세력이 충돌하는 상황에서도 옳고 그름의 판단 주체이기를 포기했다. 1920년 카프 폭동과 히틀러가 일으킨 1923년 뮌헨 폭동에서 젝트는 “군은 군에게 발포하지 않는다”거나 “질서 유지의 책임은 경찰과 주 정부의 몫”이라는 입장을 내세우며, 정부의 진압 명령을 사실상 거부한 채 사태를 관망했다. 군은 정부 전복을 시도한 세력을 지지하지도 않았지만, 동시에 그들을 제압해 헌정 질서를 수호하는 역할 역시 수행하지 않았다.

이후 군 내부에서는 헌법적 정당성보다, 현실의 혼란을 종식시키고 질서를 안정시킬 수 있는 힘이 어디에 있는가가 더 중요한 판단 기준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나치는 기존의 정치적 혼란을 수습할 수 있는 현실적 대안 세력으로 인식되었고, 군은 그 성장을 저지하지 않았다.

젝트는 강한 군대를 만드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그 군대가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하는지, 그리고 언제 어떻게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하는지 답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 대가는 결국 독일을 넘어 전 세계가 치러야 했다.


심호섭 육군사관학교 교수·군사사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