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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구원사로 읽은 선민 이야기 <5>독생녀와 재림메시아와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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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림메시아의 사명은 관계 속에서 구현된다

 

독생녀 개념을 둘러싼 논쟁의 핵심은 “이것이 재림메시아를 부정하는 주장인가, 아니면 완성하려는 사유인가.” 이 한 가지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흐리게 하면 논쟁은 감정과 진영 논리로 빠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구조적으로 접근하면 이 문제는 보다 명확해진다.

 

먼저 분명히 해야 할 점이 있다. 독생녀 개념이 논쟁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그것이 재림메시아 개념과 같은 자리를 점유하는 것처럼 오해되기 때문이다. 만일 독생녀가 재림메시아를 대체하는 새로운 구원 주체라면, 이는 기존 신앙 구조와 충돌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글에서 다루는 독생녀 개념은 그러한 대체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재림메시아를 넘어서려는 주체가 아니라, 재림메시아 사역의 목적과 완성 방향을 설명하기 위해 요청된 개념이다. 이 점을 분명히 할 때, 독생녀 논쟁은 완성 이해의 문제로 전환된다. 통일교는 문선명 총재를 예수의 사역을 계승해 구원의 완성을 이루는 재림메시아로 이해하며, 이를 동일 인격의 재림이 아닌 사명의 계승으로 설명한다.

문선명 총재의 자서전과 뒤이어 발간된 한학자 총재 자서전 표지.
문선명 총재의 자서전과 뒤이어 발간된 한학자 총재 자서전 표지.

앞선 글에서 살펴보았듯, 재림은 초림의 완성 방식이어야 한다. 완성은 언제나 관계적 구조를 요구한다. 창조가 홀로 이루어지지 않았듯, 구원의 완성 역시 단독 주체로는 성립하지 않는다. 이때 재림메시아는 구원사의 중심에서 완성을 가능하게 하는 축으로 자리 잡고, 독생녀, 곧 앞선 글에서 한학자 총재의 위치로 논의된 개념은 그 축이 지향하던 목적을 실체로 드러내는 관계의 축으로 함께 자리한다. 다시 말해, 재림메시아가 구원의 방향을 제시하고 문을 여는 존재라면, 독생녀는 그 문 너머에서 실제로 새로운 관계 질서가 작동하도록 만드는 존재다.

 

이 관점에서 보면 독생녀는 재림메시아를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독생녀 개념은 “재림메시아는 무엇을 위해 왔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재림메시아의 사명이 다시 한 번 ‘홀로 감당하는 방식’으로 이해된다면, 구원사는 또다시 희생의 반복에 머물게 된다. 그러나 재림메시아가 참부모라는 구원 구조의 완성을 향해 온 존재라면 그 사역은 독생녀 없이는 성립할 수 없다.

 

여기서 중요한 구분이 필요하다. 독생녀는 재림메시아의 ‘짝’이지만, 역할과 사명이라는 의미에서의 상보적 짝이지, 단순한 보조자나 종속적 존재가 아니다. 동시에 독생녀는 재림메시아와 경쟁하거나 그 위에 서는 존재도 아니다. 두 개념은 상하나 대체의 관계가 아니라, 역할과 사명의 분화 속에서 하나의 구원 목적을 향해 결합되는 구조다. 이 구조를 이해하지 못하면 독생녀는 곧 새로운 권력 주장으로 오해될 위험이 있고, 재림메시아는 그의 사명이 상대화된 것처럼 오해받게 된다.

냉전종식에 기여했다고 평가를 받는 문선명·한학자 총재 내외가 소련이 해체되기 1년전인 1990년 4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11차 세계언론인 대회 참석차 소련을 방문했다가 그달 11일 크렘린궁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가운데)을 만나고 있다. 당시 문 총재는 고르바초프 대통령에게 소련내 종교의 자유 허용, 남한과의 외교관계 수립 등을 권유한 것으로 알려진다.
냉전종식에 기여했다고 평가를 받는 문선명·한학자 총재 내외가 소련이 해체되기 1년전인 1990년 4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11차 세계언론인 대회 참석차 소련을 방문했다가 그달 11일 크렘린궁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가운데)을 만나고 있다. 당시 문 총재는 고르바초프 대통령에게 소련내 종교의 자유 허용, 남한과의 외교관계 수립 등을 권유한 것으로 알려진다.

실제로 독생녀 개념에 대한 내부 반발의 상당수는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재림메시아에 대한 절대적 신앙이 강할수록 그 사역이 다른 주체와 관계 속에서 완성된다는 생각 자체가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구원사가 단독 영웅 서사가 아니라는 점을 받아들인다면 이 불편함은 오히려 신앙의 해체가 아니라 성숙을 요구하는 질문으로 한단계 더 끌어올린다.

 

기독교 역사에서도 유사한 긴장은 반복되어 왔다. 예수를 신앙의 대상으로 고백하는 것과 예수가 열어 놓은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역사 속에서 구현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신앙은 고백에서 멈출 수 있지만 구원사는 삶과 질서 속에서 검증되어야 한다. 독생녀 개념은 바로 이 지점, 구원사를 고백의 차원에서 구조의 차원으로 옮기려는 시도로 읽을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독생녀가 재림메시아를 부정한다”는 주장은 구조를 놓친 해석이다. 독생녀는 재림메시아를 지우지 않는다. 오히려 재림메시아가 왜 이 시대에 와야 했는지를 설명한다. 재림메시아는 독생녀를 통해 비로소 자신의 사명이 개인적 차원을 넘어 인류사적 차원으로 확장될 수 있는 길을 얻게 된다. 결국 이 논쟁은 재림메시아냐 독생녀냐를 둘러싼 인물 논쟁이 아니라, 구원사가 어디까지 가야 하는가를 묻는 구조적 질문이다. 독생녀를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의 선택은 구원을 개인의 영혼 문제로 남길 것인가, 아니면 인류 전체의 재창조로 확장할 것인가에 대한 선택과 맞닿아 있다. 독생녀에 대한 해석은 어떤 선택을 강요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구원사가 어떤 구조를 요청하고 있는지를 분명히 보기 위한 하나의 관점을 제시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