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2학년 어버이날이었다. 학교에서는 각반 부모님 중 한 명을 선정해서 ‘장한 어버이상’을 주었다. 어떤 기준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반에서는 나의 어머니가 선정되었다. 엄마는 분홍색 양단에 은색 수실이 박힌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학교에 오셨다. 조례 대에서 시상식을 마치고 각반으로 온 부모는 일일교사를 해야 했다.
담임선생님이 엄마를 소개했고, 엄마는 쭈뼛 교탁 앞에 섰다. 반장의 구령으로 다 같이 인사하고 반 학생들은 박수로 환영했다. 담임선생님은 엄마께 1시간을 맡기고 나가셨다. 엄마는 수줍게 미소를 지으시며, “여러분들, 우야든동 선생님 말씀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해서, 우야든동 훌륭한 사람 되이소.” 그리고는 머리를 숙이며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반 아이들은 또 한 번 힘껏 손뼉을 쳤다. 1시간을 책임져야 할 일일교사가 한마디로 정리를 해버린 거다.
옆 반에서는 해양대학 교수인 아빠가 오셔서 ‘바다의 신비’라는 주제로 열강 중이었다. 나는 옆 반을 슬쩍 기웃거리며 엄마를 배웅했다. 엄마는 딸에게조차 수줍은 미소를 남기고 복도를 총총 걸어나가셨다. 그때 나는 엄마를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고, 반 친구들은 엄마의 수줍음에 기꺼이 열광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중학교 2학년 친구들이 누군가의 수줍음이 주는 진정성을 이해한다는 게 신기하다. 그때 나는 친구들의 그런 마음이 진심일지 의문도 가졌지만, 그 어떤 뒷말도 하지 않는 친구들이 참 고마웠다.
이제 엄마는 떠나셨고, 그때의 엄마가 자랑스럽기까지 한 나이가 되고 보니 엄마의 수줍던 그 미소도 가물거린다. 그런데 최근에 나는 그때 엄마의 수줍은 미소와 아주 닮은 미소를 보았다. 그분은 도봉구 ‘요셉의 집’의 소화 데레사 수녀님이셨다. 낮은 울타리 너머로 출입문이 열리며, 작은 얼굴에 수줍게 번지는 미소가 우리를 맞았다. 하얀 두건을 단정하게 쓰고 진정으로 환대하는 그 미소를 보는 순간, 언젠가 수줍게 돌아서던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지만 수녀님의 이력을 조금이라도 알게 되면 이 세상 어느 미소와도 비교할 수 없는 숭고함에 머리가 숙어진다.
소화 데레사 수녀는 30여년 동안 372명의 노인을 천국으로 배웅한 분이다. 돌볼 사람이 없어 외면당한 분들을 맞이하고, 병든 그들을 돌보다가 그분들의 임종을 지키고 장례를 치렀다. 거실 가운데 서 있는 굵은 통나무 기둥이 마치 행려 노인을 돌보는 수녀님의 의지처럼 단단하고 든든해 보였다. 수녀님이 방으로 잠깐 들어갔다가 사진 한 장을 들고 나와 보여주는데, 대전성모병원 간호사 시절의 젊은 사진이다. 사진 속의 잔잔하고 수줍은 미소는 지금과 비슷하다. 수많은 사람을 천국으로 배웅한 긴 세월 동안 전혀 변하지 않았다. 올해 여든이 된 수녀님은 오늘도 그들의 기저귀를 갈고, 음식을 떠먹이고, 몸을 씻기는 궂은일에 전혀 지친 기색도 없다. 그 수줍은 미소를 잃지 않는 한 멈추지 않을 사랑의 실천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
정현종 시인은 작년 한·일 시인 교류회의 발제문 ‘마음의 자연’에서 에머슨의 ‘경험’이라는 글 중 한 부분을 인용했다. “사람이 최상의 일을 할 때는 남의 눈에 띄지 않게 마련이다. 그의 더없이 합당한 행동에는 여러분의 관찰력을 마비시키는 어떤 마력이 있어서 비록 당신의 눈앞에서 행해졌다고 하더라도 그걸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다. 삶의 예술은 어떤 수줍음을 가지고 있으며 잘 드러나지 않을 터다.”
정현종 시인이 에머슨의 이 글에 덧붙여 이 수줍음이 인간 세상이 좀 더 나은 쪽으로 가기 위해서 대단히 중요한 얘기라고 하면서, “사람들이 수줍어하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갖고 있다면 온갖 파괴적, 소모적 싸움으로 인한 불행과 비참이 조금이라도 줄어들지 않을까”라고 덧붙였다. 소화 데레사 수녀님의 수줍음도 그 행적을 잘 드러내지 않아서, 천국으로 배웅했다는 말보다, 그냥 곁에 있었다는 말에 가까운 얼굴이다. 이 수줍은 미소에는 자부심도 없고 비장함도 없으며 슬픔의 연출도 없다. 그래서 더욱 수줍다.
천수호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