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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란의얇은소설] 변함없이 원하고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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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를 다 안다는 자식의 착각
새 출발 선언한 아버지로 인해
보호망의 의미 통째로 흔들려
안전은 때론 구속이 될 수 있다

줄리언 반스 ‘과일 보호망’(‘레몬 테이블’에 수록, 신재실 옮김, 열린책들)

내 느낌일 뿐이지만 최근 가장 화제가 되는 책은 영국 작가 줄리언 반스의 장편 ‘떠난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인 듯하다. 여든의 작가가 이것이 내 생애 마지막 책이다, 라고 공식적으로 발표한 신작. 더는 그의 지적인 유머와 기억과 인생의 통찰로 가득한 새 책을 읽을 수 없다는 사실이 아쉽기도 하고, 평생 지속해 온 글쓰기 작업을 원하는 때에 마쳐버리는 작가의 선택에 박수를 보내고 싶기도 하다. 아끼는 책 중에 이십여 년 전에 출간된 줄리언 반스의 소설집 ‘레몬 테이블’ 초판이 있는데 이참에 오랜만에 다시 읽었다.

조경란 소설가
조경란 소설가

지금은 중년이 된 아들은 소설 서두에서부터 “나는 우리 부모님을 평생 알고 있다”라는 자신감 넘치는 진술을 한다. 그럴 만도 하다. 남매인데 누나는 먼 데 살고, 자신은 독립해 가정을 꾸리면서도 부모와 연락을 끊은 적도 없으며 부모의 40주년 결혼기념일 축하 자리도 마련해 주었고 유서 작성이나 장례 문제도 상의를 마친 상태였으니까. 아들이 보기에 이제 부모는 여태 해왔던 대로 함께 정원을 가꾸고 식료품 쇼핑을 하고 차를 마시고 스크래블 게임을 하며 남은 생을 보내면 되었다. 아버지는 81세, 어머니는 80세라 노령이라고 여겨지기에.

그러나 작가도 알고 독자도 안다. 서두에 화자가 자기 부모를 평생 알고 있다는 말을 했다면 그 후부터는 그와 다른 뭔가가 펼쳐지리라는 것을. 이 소설집은 줄리언 반스가 육십 대 때 출간했다. 노련한 작가는 독자가 기대하는 이야기를 더 흥미로운 서술 방식으로 들려준다. 우선은 기억을 일깨우는 집의 각종 냄새로, 부모의 출생과 만남과 성격에 대해, 마을에 대한 설명부터 천천히 점진적으로. 마치 유머와 슬픔으로 짠 그물을 넓게 펼쳐 독자를 사로잡듯이. 아버지는 “높으신 분” 혹은 “정부”라고 부르는 어머니의 의사를 존중했고, 어머니는 집안의 훌륭한 “조직자” 역할을 했다.

알고 지내던 미망인 엘지와 남은 시간을 살겠다고 아버지가 선언하자 그 질서정연한 삶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들은 아버지, 어머니, 엘지 사이에서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하려 하며 이런 생각을 한다. 자신이 노령을 뇌쇠의 시기로 여겨버렸던 건 아닌가? 부모에 대해 무엇을 아는가? 나는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빠 없이 엄마는 어떻게 살아요?” 아버지는 말했다. “자립하는 거지.” 엄마는 1인 정부가 될 수 있는 사람이라며. 아들은 사랑을 찾아 집을 나간 아버지와 인생을 비관하는 어머니에게서, 그들이 자신이 아직 알지 못하는 세상의 지식을 재확인시켜 주는 “어버이”가 되었음을 다시 느낀다.

부모 몰래 엘지를 찾아가자 그녀가 나에게 말했다. 변함없이 원하고 있는 것을 버리는 사람은 없다고. 제목인 ‘과일 보호망’이 언급되는 장면이 세 번 나온다. 부모가 정원에다 새나 두더지로부터 과일을 보호하기 위해 “강화된 방어 시설”인 보호망을 함께 세울 때. 그전까지 아버지가 나에게 준 유일한 충격이 과일 보호망에서 잡은 새의 목을 비트는 거였다고 고백할 때. 이 혼란 속에서 아버지가 그 안에서 혼자 정원 일을 할 때. 강화된 방어 시설인 과일 보호망이 뜻하는 게 무엇인지 생각에 잠겨보고 싶어진다. 안다고 믿었던 가족 관계, 지나친 보호망인 집, 보호가 아니라 구속, 안전하다고 믿고 싶은 정신적인 공간.

아버지가 반신 마비로 입원한 지 두 달째. 어머니와 엘지는 요일을 나눠 방문하고 아들은 모두를 보고 있다. 엘지에 의하면, 어머니에 의하면, 경찰에 의하면, 하는 방식으로 그간의 일을 작가는 재치 있게 진술하고 인물들은 모두 생생하게 살아 있다. 아버지는 병실에서 누가 나갈 때마다 불분명한 발음으로도 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의 아내, 그래. 많은 행복한 세월들”이라고. 그 행복한 세월이 과거인지 미래인지 중년의 아들은 아직 헤아릴 수 없지만.

부모에 대해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얼마나 될까. 갑자기 이런 마음이 든다. 변함없이 원하고 있는 것, 부모에게 이것 한 가지만은 물어봐야겠다고. 그게 지금은 함께 하는 것, 가족이라고 말해주면 좋겠다고 기대하면서.

 

조경란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