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 체류하며 쇼트폼드라마 몇 편을 봤다. 스마트폰 화면에 최적화된 세로형 1~2분짜리 영상이 수십 편 이상 이어지는 형식이다. 한 편이 끝나면 다음 편이 자동으로 재생되고, 돈만 내면 그다음이 또 이어진다.
제목만 봐도 결말까지 훤히 보이는 작품이 대부분이다. ‘가난한 사위는 회장님’, ‘기억을 잃은 재벌 딸’, ‘다시 태어난 재벌 아들’ 등등. 제목 자체가 내용 전체 요약이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손을 떼기 어렵다. 시쳇말로 고구마를 자꾸만 퍼먹이다 어느새 사이다 전개로 이어지는 식이라 약 100편을 쉬지 않고 보게 된다.
가격은 일주일 무한 시청에 2만원 남짓. 가장 비싼 넷플릭스 한 달 요금제보다도 비싸다. 회차별 결제도 가능하지만 한 편에 300원 안팎이라 한 작품만 전체 감상해도 기간제 요금이 싸다. 나 역시 두어 번 결제했는데, 보다 보니 돈을 내고 시간을 버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언젠가부터는 아예 안 보게 됐다.
그런데 영상을 보며 K콘텐츠의 또 다른 기회가 혹시 여기에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쇼트폼드라마 시장의 성장 속도는 빠르다. 글로벌 시장에서는 이미 연간 수조 원대 규모로 커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국내에서도 시청 시간이 빠르게 늘고 있다. 쇼트폼드라마 플랫폼 ‘비글루’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쇼트드라마 누적 시청 시간은 200만 시간을 돌파했다.
한국 영상 콘텐츠의 경쟁력을 떠올리면 가능성은 더 커 보였다. 한국 드라마는 오랫동안 아침드라마와 이른바 ‘막장드라마’를 거쳐오며 다음 편이 궁금해지는 연출에 특화됐다.
하지만 즐거운 상상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는 맛이 무서운 것인지, 쇼트폼 시장에서는 오히려 중국산 드라마의 공습이 더 거세 보였다. 처음에는 중국 드라마에 달린 한국어 자막의 퀄리티가 낮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자막의 질이 눈에 띄게 좋아지더니, 한국어 더빙도 전문 성우가 한 것처럼 자연스러워졌다.
이후에는 아예 중국에서 먼저 만든 쇼트폼드라마를 그대로 가져와 한국 배우로 리메이크하는 단계까지 왔다. 제목만 봐도 중국 오리지널로 추측되는 ‘시골 남편이 재벌이었다’ 같은 작품은 북미 버전도 공개됐다. 포맷과 서사가 이미 검증된 만큼 언어와 배우만 바꿔 시장을 넓히는 방식으로 보인다.
이런 흐름을 보며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상황인가 싶기도 했다. 다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꼭 그렇게 단정할 일만은 아니다 싶었다. 저급하다고 비웃기 쉬운 서사라도 분명 수요가 있고, 그 수요에 맞춰 콘텐츠가 생산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니까. 문제는 그 자리를 누가 차지하느냐다.
최근 들어 희망적인 신호도 나오고 있다. 콘텐츠 업계에 따르면 충무로의 유명 감독과 배우들이 다양한 작품을 준비하고 있다. 메이저 배급사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쇼박스는 최근 첫 쇼트폼드라마 제작에 나서며 국내외 시장 진출을 공식화했다. 쇼박스는 영화와 드라마 분야에서 쌓은 기획·제작 노하우를 바탕으로 쇼트폼 콘텐츠를 지속해서 내놓겠다는 계획이다.
쇼트폼드라마는 가볍고 얕아 보이지만 그만큼 시장의 반응은 솔직한 듯하다. 한국 시장이 이런 흐름에서 단순한 소비자가 될지, 아니면 한국 콘텐츠가 다시 한번 판을 흔드는 공급자가 될지는 이제 본격적인 시험대에 오른 것으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