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지리아 법원이 영국 식민지 시절의 이른바 과거사 사건과 관련해 ‘영국이 거액을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려 양국 관계가 미묘해진 시점에 영국 왕실이 나이지리아 대통령의 영국 국빈 방문 일정을 발표해 눈길을 끈다. 1960년 영국에서 독립한 나이지리아는 영어를 공용어로 쓰는 영연방 회원국으로, 그간 영국과는 비교적 좋은 관계를 유지해왔다.
7일(현지시간) BBC 방송에 따르면 버킹엄궁은 볼라 티누부(73) 나이지리아 대통령 부부가 오는 3월18일 찰스 3세 국왕의 초청으로 영국을 국빈 방문한다고 밝혔다. 영국이 나이지리아 국가원수를 국빈으로 맞아들이는 것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시절인 1989년 이후 37년 만에 처음이다. 찰스 3세는 왕세자 시절인 1990년, 1999년, 2006년, 2018년 총 4차례에 걸쳐 나이지리아를 방문한 경험이 있다.
나이지리아는 인구가 약 2억3000만명으로 아프리카에서 가장 많다. 전 세계에서도 인도, 중국, 미국,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다음의 6위 인구 대국이다. 자연히 나이지리아는 영국 입장에서 아프리카 최대 교역국에 해당한다. 2024년 두 나라 간에 무역 및 투자 협력 협정이 체결되는 등 외교적·경제적 관계도 매우 좋은 편이다.
그런데 최근 나이지리아 법원에서 나온 판결 하나가 양국 사이의 잠재적 갈등 요인으로 지목됐다. 나이지리아가 아직 영국 식민지이던 1949년 벌어진 광부 집단 학살 사건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소송 재판이 그것이다. 당시 나이지리아 남부 에누구주(州)의 어느 석탄 광산에서 광부들이 가혹한 노동 조건에 반발하며 탄광을 점거한 채 시위를 벌였다. 진압에 나선 경찰이 총격을 가하면서 무려 21명의 광부가 목숨을 잃었다. 이는 나이지리아 전역에 반영(反英) 감정이 확산하는 계기가 됐으며, 결국 나이지리아는 11년 뒤인 1960년 영국 식민지에서 벗어나 독립국이 되었다.
희생자 유족이 제기한 손배소 사건 심리를 맡은 재판부는 이날 “영국 식민 당국의 책임이 인정된다”며 원고들 손을 들어줬다. 그러면서 영국 정부가 희생자 21명의 유족에게 각각 2000만파운드(약 399억 원)씩 총 4억2000만파운드(약 8379억원)를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희생된 광부들은 비무장 상태에서 근로 조건 개선만 요구했을 뿐”이라며 “공권력에 의한 생명권 침해임이 명백하다”고 밝혔다.
영국 정부는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으나 상당히 곤혹스러운 표정이다. 영국은 옛 식민 통치에 대해 반성의 뜻을 표하면서도 “제국주의 시대에 국제적으로 통용된 관행이었다”는 이유를 들어 정부 차원의 공식적 사과는 하지 않고 있다. 프랑스 등 제국주의 역사를 지닌 다른 강대국들도 비슷한 입장이다.
나이지리아와의 무역·투자 협정 체결로 경제 협력이 본격화할 것을 기대했던 영국 측에선 이번 판결이 양국 관계에 찬물을 끼얹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감지된다. 그 때문에 영국 왕실이 화려한 국빈 외교를 통해 나이지리아 측의 반감을 누그러뜨리는 이른바 ‘소프트 파워’를 발휘해주길 기대하는 분위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