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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부사 차준환, 차분한 승부수 [밀라노 동계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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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 이 경기

11일 男 피겨 싱글 쇼트 안무곡
伊 작곡가 ‘레인 인 유어…’ 선택
초반 고요… 선수 움직임 돋보여
‘쇼트=강렬한 도입부’ 공식 뒤집어
4회전 살코 점프 등 완성도 관건
팀 경기선 실수… 중압감 떨쳐야

피겨스케이팅 쇼트프로그램에서는 경기 시작 직후 약 30초 안에 첫 점프가 이뤄진다. 이 구간에서 프로그램의 첫인상이 결정된다. 따라서 선수들은 전개가 빠르거나 리듬이 분명한 음악을 택해 왔다. 음악이 초반 분위기를 만들어주면 기술에 집중하기가 쉬워지기 때문이다. 선곡이 곧 전략인 셈이다.

 

하지만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 올림픽에서 남자 피겨 ‘간판’ 차준환은 의외의 선택을 했다. 11일 오전 2시30분(한국시간) 남자 싱글 쇼트에 출전하는 그는 ‘강한 출발’ 대신 ‘조용한 완성도’를 내세웠다. 차준환의 싱글 쇼트는 절제에서 시작한다. 음악은 이탈리아 작곡가 에치오 보쏘의 ‘레인 인 유어 블랙 아이즈’(Rain in Your Black Eyes). 서두부터 관객을 흔들지 않는 기악곡으로, 반복과 미세한 변화로 분위기를 쌓아간다. 음악은 빙판 위에서 고요하게 흐르기에 선수의 움직임에 시선이 모인다. 차준환은 손끝으로 원을 그리며 음악의 시작을 짚고, 잠시 손으로 눈을 가리는 동작을 한 뒤 프로그램의 방향을 잡는 연기를 펼칠 예정이다.

한국 남자 피겨스케이팅 ‘간판’ 차준환이 8일 이탈리아 밀라노 아이스스케이팅 아레나에서 열린 2025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 올림픽 피겨스케이팅 팀 이벤트 남자 싱글 쇼트 프로그램에서 연기를 펼치고 있다. 밀라노=연합뉴스
한국 남자 피겨스케이팅 ‘간판’ 차준환이 8일 이탈리아 밀라노 아이스스케이팅 아레나에서 열린 2025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 올림픽 피겨스케이팅 팀 이벤트 남자 싱글 쇼트 프로그램에서 연기를 펼치고 있다. 밀라노=연합뉴스

결국 음악보다는 선수의 스케이팅과 해석에 따라 인상이 만들어진다. 이 때문에 이 곡은 비교적 호흡이 긴 프로그램에서 활용됐다. 차준환의 라이벌로 꼽히는 일본의 가기야마 유마는 2023 국제빙상연맹(ISU) 피겨 세계선수권 프리 프로그램에 이 곡을 사용했다. 프랑스의 아이스댄스 올림픽 챔피언 가브리엘라 파파다키스·기욤 시즈롱, 중국의 페어 올림픽 챔피언 수이원징·한충도 이 곡으로 연기했다.

 

차준환은 최근까지 음악의 리듬이나 보컬이 초반 분위기를 이끌어주는 곡을 택했다. 미국 록밴드 이매진 드래곤스의 ‘내추럴’(Natural·2024-2025 시즌), 러시아 왈츠인 ‘가면무도회’(2023-2024 시즌), 팝의 황제인 마이클 잭슨의 메들리(2022-2023 시즌) 등 모두 음악이 초반 분위기를 주도하는 곡이다.

 

이번 쇼트프로그램의 꽃은 스텝 시퀀스. 다양한 스텝과 턴으로 빙판을 날아다니며 표현력을 보여주는 구간이다. 엣지를 깊게 눌러 흐름을 늦췄다가, 상체의 방향을 바꾸며 다시 속도를 끌어올린다. 스텝과 몸의 전환이 음악의 완급에 따라 프로그램의 리듬을 만든다. 스케이팅 그 자체로 음악을 설명하는 셈이다.

7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밀라노 아이스스케이팅 아레나에서 열린 팀 이벤트 남자 싱글 쇼트프로그램에서 차준환이 연기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7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밀라노 아이스스케이팅 아레나에서 열린 팀 이벤트 남자 싱글 쇼트프로그램에서 차준환이 연기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기술 구성도 만만치 않다. 쇼트에 포함된 4회전 살코 점프는 도약 순간 회전축이 조금만 흔들려도 착지에서 크게 흔들릴 수 있는 고난도 기술로 꼽힌다. 이번 시즌 살코 자체로는 큰 실수가 없었지만, 도입부가 조용한 음악에서는 작은 흔들림도 더 선명하게 드러날 수 있다. 실제로 차준환은 지난달 2026 ISU 사대륙권 피겨선수권에서 같은 곡으로 트리플 러츠-트리플 루프 콤비네이션(세 바퀴 점프 두 개를 연속으로 뛰는 연결 점프)을 시도하다가 넘어져 6위에 머물렀다. 8일 올림픽 팀 이벤트 쇼트에서도 마지막 점프 과제인 트리플 악셀(공중 세 바퀴 반)을 싱글 악셀(공중 한 바퀴 반)로 처리해 8위에 그쳤다. 다만 팀 이벤트 이후 “개인전 때는 실수 없이 하겠다”고 밝힌 만큼 고난도 구성의 완성도가 이번 쇼트의 관건이다.

 

관전 포인트는 분명하다. 음악이 대신 말해주지 않는 초반 30초를 어떻게 채우느냐다. 스케이팅 속도와 엣지, 표현력으로 그 시간을 설득할 수 있다면, 이 쇼트는 분명히 살아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