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은주가 영하 10도를 넘나든 6일 오후 경기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일대. 덤프트럭과 철제 부품을 실은 화물차, 타워크레인 등이 뒤섞여 바쁘게 움직였다. 뼈대가 올라간 팹(fab·반도체 생산시설)을 둘러싼 타워크레인들은 일사불란하게 공정에 필요한 물품들을 실어 올렸다.
SK하이닉스가 원삼면 일원 415만6135㎡(약 126만평)에 122조원을 투입해 4기의 팹을 짓는 반도체 일반산업단지 건설 현장이다. 지난해 2월 1기 팹 공사를 시작한 지 1년 만에 주변 건물까지 빠르게 윤곽을 갖췄다. 1기 팹은 이미 14층 높이 건물의 9층까지 올라왔는데, 일반 건물과 비교하면 30층 정도 된다.
이곳 일반 산단에는 팹 외에 협력화단지, 인프라 부지 등이 들어서게 된다. 이미 1기 팹 건물 주변에는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특수약품·냉각수·증기 등의 공급 시설(CUB)과 용수 재활용 시설(WWT), 사무동이 같은 속도로 모습을 드러냈다.
산단에 전력을 공급하기 위한 3층 규모의 한국전력 동용인변전소 역시 막바지 공사에 들어갔다. 내년 2분기는 돼야 반도체 공장이 처음 가동되지만 전력 공급 채비를 마친 셈이다. 관련 시설들이 완공되면 4기의 초대형 팹에서 매월 80만장이 넘는 웨이퍼 생산이 가능하다.
◆“전력·용수 확보…이전 쉽지 않아”
해가 질 무렵 이곳은 거대한 도시를 연상시키며 불야성을 이뤘다. 24시간 공사가 이어지며 1기 팹 건물은 하루가 다르게 높아졌다. 호황을 맞은 메모리 반도체 생산량을 늘리려면 팹 건설 기간을 단축해야 하기 때문이다.
현장의 공사 관계자는 “1만명이 넘는 인력은 날씨가 풀리면 더 불어날 것”이라며 “2027년 5월 준공이 목표이지만 인공지능(AI) 반도체 기술 성장에 따른 고성능 칩과 메모리 수요가 늘면서 현장에서도 완공 시기를 앞당기려 노력하고 있다”고 전했다. 최근 정치권에서 불거진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지방 이전론’과 관련해선 “공사 전부터 전력과 용수를 확보하려는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안다. 지금 상황이라면 이전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11일 용인특례시와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용인을 축으로 하는 세계 최대·최고의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 조성은 이미 계획 단계를 넘어 궤도에 오른 상태다. 클러스터는 용인을 중심으로 평택·화성·이천·성남·수원·안성 일대에 걸쳐 있다.
용인 처인구에는 원삼면 일원의 SK하이닉스 일반산단 외에 이동·남사읍 일원에 삼성전자가 투자하는 777만3656㎡(약 235만평) 규모의 첨단시스템반도체 국가산단이 들어선다. 삼성전자가 360조원을 투자해 초대형 팹 6기를 세우는 사업이다. 향후 늘어나는 투자액을 고려하면 두 회사가 용인지역에 쏟아붓는 비용만 1000조원에 달할 전망이다.
첨단시스템반도체 국가산단을 중심으로 30㎞ 반경 안에는 32기의 대형 팹과 용인·화성 연구단지, 성남 판교의 팹리스단지 등이 둥지를 틀게 된다. 국내 반도체 소재·부품·장비(소부장) 기업 10곳 중 9곳 이상이 클러스터에 몰리면서 반도체 제조·연구기능을 유기적으로 연계한다.
◆‘시간이 보조금’인 반도체 클러스터
앞서 정부는 기존 19기 생산 팹과 2기 연구 팹에 13기 초대형 팹과 3기 연구 팹을 추가하는 내용의 계획안을 2024년 1월 발표했다. 이 중 용인에 들어설 10기의 초대형 팹은 고대역폭메모리(HBM) 등 최첨단반도체와 2nm 이하 공정시스템반도체의 생산기지 역할을 맡는다.
삼성전자 국가산단은 아직 대규모 공사가 시작되지 않은 상태다. 다만 법규에 따라 문화재 발굴조사가 시작되는 등 행정절차에 속도가 붙었다. 용인시 관계자는 “토지와 지장물 등의 보상은 27%가량 진행됐다”며 “인허가를 신속히 진행하는 등 기업 지원에 나선 적극행정이 통했다”고 설명했다. 시행자인 한국토지주택공사(LH)는 지난해 12월 삼성전자와 산업시설용지 분양계약을 맺은 뒤 보상 협의를 시작했다.
이곳 국가산단은 2023년 3월 후보지로 선정된 이후 1년9개월 만인 2024년 12월 산단 계획 승인·고시가 이뤄졌다. 4년6개월 정도 걸리던 기간을 크게 단축했다. 용인시는 정부와 협력해 환경영향평가를 비롯한 다양한 영향평가를 신속히 마무리했고 사전 협약에 따라 시행자에 대한 예비타당성 조사도 면제받았다. LH는 2031년까지 기반 조성공사를 마칠 예정이고, 삼성전자는 이곳에서 2030년 첫 번째 팹을 가동할 계획이다.
‘시간이 보조금’이라는 클러스터 조성공사는 이처럼 속도전 형태로 진행 중이다. 산을 깎아 논밭을 메우는 일반산단 조성공사의 경우 70.8% 진행됐다. 내년 말에는 기반 조성공사가 끝날 예정이다. 핵심 인프라인 용수와 전기 공급시설 공사는 막바지 단계에 왔다. 전기 공급시설 공정률 역시 97.1%에 달한다. 전력구나 변전소 건물에 케이블을 설치 중이어서 7월이면 완공된다. 조성 책임자인 장효식 SK에코플랜트 부사장은 “용인시의 유례없는 전폭적 지원으로 계획보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5대 소부장 업체들도 속속 입주 중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선 생산라인 외에 대규모 연구·개발(R&D)시설 투자도 병행되고 있다. 삼성전자 기흥캠퍼스(미래연구단지)에 20조원이 투자된 연구 팹 3기는 반도체 초격차 기술 유지에 일조하게 된다. 원삼면 일반산단에는 소부장(소재·부품·장비) 기업들의 경쟁력 확보에 필요한 테스트베드(양산연계형 미니팹)가 용인시·경기도·SK하이닉스의 협업을 거쳐 조성된다.
램리서치코리아는 2022년 기흥구 지곡동에 미국 외 최대 규모 R&D센터인 코리아테크놀로지센터를 개장해 운영 중이다. 도쿄일렉트론코리아는 일반산단에 R&D센터를 신축하고 있다. 앞서 주성엔지니어링과 고영테크놀로지, 테스 등 반도체 기업들도 용인에 대규모 R&D센터를 설치했다.
소부장 기업의 초고도 장치산업도 줄을 서고 있다. 이상일 용인시장은 용인으로 들어왔거나 들어오기로 확정된 소부장 기업만 92곳이라고 밝혔다. 이 중 연간 매출액 1000억원이 넘는 기업만 25곳이다. 세계 5대 반도체 장비업체 가운데 ASML과 램리서치, 도코일렉트론 등이 이름을 올렸다. 국내 업체 중에선 에어프로덕츠코리아, 이엔에프테크놀로지, 유진테크, 테스, 로체시스템즈, 주성엔지니어링 등이 둥지를 틀었고 원익IPS, 솔브레인, 주성엔지니어링, SK스페셜티 등이 입주를 확정했다.
용인시는 최근 지역 반도체 생태계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도록 주제도(Index Map) 형식으로 제작된 ‘반도체 지도’를 누리집에 공개했다. 단일 도시로는 세계 최대 규모로 조성 중인 반도체 클러스터 현황을 쉽게 파악하도록 돕기 위해서다.
◆이상일 용인시장 “잘되는 산업 빼가 다른 곳 주는 것은 균형발전 아니다”
“반도체 산업은 전력과 용수도 중요하지만 관련 산업 생태계와 인력, 교통 등 다양한 분야의 인프라 역시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이상일(사진) 용인특례시장은 최근 불거진 용인지역 반도체 클러스터의 지방 이전론에 대해 “비현실적 주장”이라고 잘라 말했다.
이 시장은 11일 세계일보와 인터뷰에서 “기업 이전은 기업이 판단할 몫인데 일부 정치인들의 반도체 생태계 본질을 무시한 발언에 기업들은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다”며 “논란을 잠재우는 단 하나의 길은 대통령과 정부가 ‘용인에서 당초 계획대로 차질 없이 진행하겠다’는 입장을 천명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시장은 “반도체 산단 이전 주장이 새만금에서 익산, 순천, 구미, 천안 등으로 확산하고 있다.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이 장기프로젝트인 만큼 이 같은 논란은 6월 지방선거가 끝나더라도 (2028년 4월 총선까지) 계속 불거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 시장은 이전론의 배경인 지역 균형발전론에 대해선 “다른 지역에서 잘 진행되는 산업을 빼앗아 다른 곳에 가져가는 것이 균형발전은 아니지 않으냐”고 되물었다. 그러면서 “2023년 3월 정부가 전국에 15개 국가산단 후보지를 발표했을 때 전북 완주에는 수소특화단지를, 익산에는 식품클러스터를 지정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사업들이 잘 진행되는지부터 해당 지역 정치인들은 챙겨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용인의 반도체 일반·국가산단 사업이 빠르게 진행되는 가운데 일부 팹(fab·반도체 생산시설)만 다른 지역으로 가져간다는 주장도 속도가 생명인 반도체 산업의 생태를 간과한 주장이라고 꼬집었다. 용인·화성·평택·이천 등 수도권에 국내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기업의 90% 이상이 집결했다는 이유를 들었다.
이 시장은 “반도체 산업 특성상 제조 공정에서 발생하는 미세한 공정 오류를 바로 해결해야 하고, 포토레지스트와 같은 핵심 소재는 기온이나 습도 변화에 극도로 민감해 장거리 운송이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그는 “반도체 산업은 분초를 다투는 극한 경쟁을 벌인다”며 “국가의 미래 경쟁력을 위해 속도와 실행을 보여줘야 할 시기인 만큼 지방 이전론은 조속히 종식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