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체적인 의혹에 대해선 마운트배튼윈저 씨(Mr. Mountbatten-Windsor)가 답할 일이다.”
9일(현지시간) 영국 왕실 대변인이 발표한 성명의 일부다. 여기서 ‘마운트배튼윈저 씨’란 찰스 3세 국왕의 남동생 앤드루 마운트배튼윈저(66)를 지칭한다. 한때 “앤드루 왕자”로 불리며 영국은 물론 세계 사교계를 주름잡은 그는 미국의 억만장자 성범죄자 제프리 엡스타인(2019년 감옥에서 사망)과의 부적절한 관계가 들통나 왕실에서 퇴출된 상태다.
버킹엄궁은 이날 영국 경찰이 앤드루를 상대로 수사에 착수하는 경우 찰스 3세 등 왕실 구성원들은 경찰에 적극 협조할 것이라고 밝혔다. 앤드루가 엡스타인과 각별한 친분을 유지하며 엡스타인 별장에서 성접대를 받았다는 의혹은 오래전부터 제기됐다. 그로 인해 앤드루는 왕자 칭호는 물론 영국 왕실의 모든 훈작(勳爵)을 빼앗기고 평민으로 내려앉았다.
그런데 이후로도 앤드루를 둘러싼 비리 정황이 고구마 줄기처럼 계속 드러나고 있다. 최근 미국 법무부가 공개한 일명 ‘엡스타인 파일’에는 2010∼2011년 앤드루가 엡스타인에게 보낸 이메일이 포함돼 있다. 여기에는 앤드루가 싱가포르, 홍콩, 베트남 방문 그리고 전쟁으로 파괴된 아프가니스탄 재건을 위한 투자 기회 등에 관한 고급 정보를 엡스타인에게 넘긴 것으로 추정할 만한 내용이 담겼다. 싱가포르, 홍콩, 아프간은 모두 과거 영국 식민지였다.
특히 아프간 관련 정보에는 외부 유출이 금지된 기밀 사항도 들어 있다고 영국 언론은 전했다. 영국 군주제에 비판적인 시민단체는 문제의 이메일 문건이 작성된 2010∼2011년 앤드루가 왕자 신분으로 영국 정부의 ‘무역 특사’를 지낸 사실을 지목하며 그를 공무상 부정 행위와 기밀 누설 등 혐의로 경찰에 고발했다.
이날 버킹엄궁은 찰스 3세가 앤드루의 그릇된 행위와 관련해 계속되는 의혹 제기에 깊은 우려를 표명했다고 밝혔다. 이어 의혹에 답해야 할 주체는 앤드루 본인이지만, 만약 경찰이 수사에 나서 왕실에 협조를 요청한다면 기꺼이 응할 준비가 돼 있다고 덧붙였다. 버킹엄궁은 “찰스 3세 국왕과 커밀라 왕비는 엡스타인 사건의 모든 피해자에게 깊은 위로의 뜻을 표한다”고도 했다.
영국 왕실의 이 같은 조치는 엡스타인과의 악연을 빨리 손절하지 않으면 찰스 3세의 미국 방문에까지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에서 비롯한 것으로 풀이된다. 아직 공식 발표는 이뤄지지 않았으나 찰스 3세 부부는 오는 4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초청으로 미국을 국빈 방문할 예정이다. 이는 미국 독립 250주년 기념 행사의 일환으로, 미국이 1776년 영국 식민지에서 벗어나 독립한 것을 영국이 축하한다는 상징적 의미가 강하다. 하지만 지금 같아선 찰스 3세는 방미 기간 내내 “앤드루가 엡스타인 악행에 얼마나 가담했는지 전모를 밝혀야 한다”는 미국인들의 항의 시위에 직면할 가능성이 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