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사는 왜 서로 다른 주체를 요청해 왔는가
독생자 예수와 독생녀 한학자를 나란히 놓는 순간, 많은 이들은 즉각적인 거부감을 느낀다. 비교 자체가 불경(不敬)처럼 보이기도 하고, 두 존재를 같은 자리에 올려놓는 행위가 신앙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비교는 동급 경쟁이나 위상 판단이 아니다. 구원사가 시대마다 어떤 주체와 사명을 요청했는지를 이해하기 위한 구조적 고찰이다.
먼저 분명한 것은, 예수는 기독교 신앙의 출발점이며, 인류 구원사의 전환점이라는 사실이다. 그의 독생자적 위치는 그 누구로도 대체될 수 없다. 그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생긴 단절을 다시 잇는 길을 처음으로 열었고, 구원이란 인간이 어떤 존재로 서 있고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의 문제임을 선언했다. 예수는 ‘시작자’였고, 그 시작은 인류사에서 단 한 번 일어난 절대적 사건이다.
그러나 그 이유 때문에 예수의 사명은 분명한 역사적 단계성도 지녔다. 예수는 타락 이후의 인류에게 처음으로 구원의 방향을 제시해야 했기에 모든 것을 홀로 감당해야 했다. 가족도, 짝도, 제도도 없이 그는 단독자로 서야 했다. 독생자라는 호칭은 그의 신성을 말함과 동시에 그가 감당해야 했던 역사적 고독을 드러내는 말이기도 하다. 반면 독생녀 한학자는 통일교라는 특정 신앙 공동체 안에서 그렇게 이해되어 온 인물로, 전혀 다른 시대적 조건 속에서 논의된다. 이미 기독교 문명이 전 세계로 확산된 이후 개인 구원과 영혼 구원에 대한 해석은 충분히 축적된 시대다. 그러나 그만큼 분열도 깊어졌다. 개인은 구원받았다고 말하지만, 가정은 해체되고, 사회는 갈등하며, 인류는 여전히 전쟁과 적대 속에 있다. 그러나 이 시대가 요청하는 구원은 이제 ‘시작’을 넘어선 ‘완성’이어야 한다.
이것이 두 선민의 본질적 차이다. 예수가 독생자로서 길을 열었다면, 독생녀는 그 길 위에서 인류가 실제로 살아갈 수 있는 질서를 세우는 사명을 감당한다. 예수가 “아버지께로 가는 길”을 제시했다면, 독생녀는 그 길이 가정과 사회, 역사 속에서 구현될 수 있는 조건을 떠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두 존재는 같은 잣대로 이해될 수 없다. 예수는 십자가가를 통해 구원의 문을 열었고, 그 기초를 놓았다. 한학자는 고통의 반복이 아닌 관계의 회복과 생명의 계승을 통해 그 완성을 지향한다. 실제 그는 세계적인 종교·정치계 지도자들을 만나며 그런 사명을 담당해 왔다. 이는 역할의 차이일뿐, 가치의 우열이 아니다. 시작과 완성은 서로를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시작이 없으면 완성은 불가능하고, 완성이 없다면 시작은 목적을 잃기 때문이다.
여기서 ‘두 선민’의 의미는 분명해진다. 선민은 서로 경쟁하거나 서열을 겨루는 존재가 아니다. 선민은 각 시대의 절박한 요청 앞에 응답하는 존재다. 예수는 타락 이후의 인류 앞에 서야 했고, 한학자는 분열 이후의 인류 앞에 서 있다. 타락이 인간 존재의 방향이 어긋난 사건을 의미한다면, 분열은 그 어긋남이 역사 속에서 관계와 구조로 굳어진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병증이 다르기에 처방이 다를 뿐, 이전의 처방이 무효화된 것은 아니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독생녀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예수가 독생자로서 단독 사명을 수행했다면, 독생녀는 재림메시아와 더불어 참부모라는 공동 사명 구조 안에서 존재한다. 이는 구원사가 더 이상 단독 영웅 서사로는 완성될 수 없다는 통찰의 결과다. 여기서 재림메시아는 다시 한 번 ‘홀로 모든 것을 완성하는 존재’를 뜻하지 않는다. 재림메시아란 독생자가 열어 놓은 구원사의 방향 위에서 개인 구원을 넘어 가정과 인류 공동체의 질서를 실체화하는 주체를 가리킨다. 그런 의미에서 재림메시아의 사명은 독생녀와 분리될 수 없으며, 참부모라는 관계적 구조 안에서만 비로소 완성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따라서 독생자 예수와 독생녀 한학자를 비교하는 것은 구원사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묻는 과정이다. 한 사람은 문을 열었고, 다른 한 사람은 그 문 위에 세워진 집을 완성해야 하는 사명을 맡았다. 이 비교가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신앙의 대상이 흔들렸다는 인식과 무관하다. 오히려 구원사를 바라보는 시야가 확장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예수를 높이는 신앙과 예수가 열어 놓은 구원의 방향을 삶과 역사 속에서 끝까지 구현하려는 사유는 충돌하지 않는다. 오히려 후자가 없다면 전자는 역사 속에서 박제된 추상으로 남을 위험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