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성년자 성착취범 제프리 엡스타인이 사망한 뒤에도 미국과 영국 정계를 뒤흔들고 있다. 엡스타인의 전 연인이자 공범인 길레인 맥스웰 측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사면을 요구하면서 증언을 거부했다. 복역 중인 자신을 사면해 주면 트럼프 대통령의 엡스타인 연루 의혹을 벗길 증언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는 엡스타인과 직간접적으로 연루됐다는 의혹이 제기되며 사퇴 압박에 몰렸다.
9일(현지시간) 워싱턴포스트(WP), 뉴욕타임스(NYT) 등에 따르면 맥스웰은 이날 연방 하원 감독위원회에 화상 출석한 증언 녹취 조사에서 답변을 거부했다.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강요당하지 않을 권리를 규정한 미 헌법 5조의 권한을 행사한 것이다. 맥스웰은 2021년 성매매 혐의로 20년 형을 받고 텍사스주의 연방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다.
이날 조사는 엡스타인의 범죄와 추가 공범 의혹 등에 대해 질의하기 위해 열렸다. 그러나 맥스웰의 답변 거부로 조사는 시작한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끝났다.
맥스웰의 변호인인 데이비드 오스카 마커스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내 조언으로 맥스웰은 질문에 답하지 않기로 한 것”이라며 “트럼프 대통령의 사면을 받는다면 모든 것을 솔직히 밝힐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트럼프 대통령과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엡스타인과 관련해) 어떤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으며, 맥스웰만이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사법 거래’를 요구하는 발언에 미국 정치권은 한목소리로 맥스웰 측을 비난했다. 하원 감독위원회 위원인 애나 폴리나 루나 공화당 의원은 “아동 성범죄자에게는 어떠한 사면이나 자비도 없다”고 밝혔다. NYT는 맥스웰 측의 주장에 대해 민주당이 사면을 받기 위한 시도일 뿐이라며 일축했다고 전했다.
WP는 “트럼프 대통령은 맥스웰의 사면이나 감형을 고려하고 있지 않다는 뜻을 내비쳤지만, 그런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한 것도 아니다”라며 “트럼프 행정부가 엡스타인과 연루된 인사에 대해 대처하는 방식이 지지층에서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시점에 나온 발언”이라고 전했다.
백악관은 엡스타인 연루 의혹을 받는 러트닉 장관을 옹호하며 사퇴 요구를 회피하고 있다. 러트닉 장관은 2005년 이후 엡스타인과 교류를 끊었다고 주장했으나, 최근 법무부가 공개한 문건에서 2012년까지 이메일을 주고받았다는 사실이 공개되며 거짓 해명 논란에 휩싸였다. 이에 민주당뿐 아니라 공화당에서도 러트닉 장관이 사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백악관은 “러트닉 장관과 상무부 등 트럼프 행정부는 여전히 국민을 위한 성과 창출에 집중하고 있다”고만 밝히며 거취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영국 정계에서도 엡스타인 문건 공개의 여파가 이어지고 있다. 아나스 사와 스코틀랜드 노동당 대표는 이날 기자회견을 열어 스타머 총리의 퇴진을 요구했다. 스타머 총리는 피터 맨덜슨 전 산업장관이 엡스타인과 지속적인 친분을 유지한 것을 알면서도 그를 기용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스타머 총리는 노동당 의원총회에 참석해 “물러나 나라를 혼란에 빠뜨릴 생각은 없다”며 정면 돌파 의지를 밝혔다. 영국 BBC 방송은 총회에 참석한 의원들이 스타머 총리에게 박수갈채를 보내며 지지의 뜻을 밝혔다고 전했다. 데이비드 래미 영국 부총리 등 스타머 내각 각료들도 총리를 지지한다는 뜻을 표하며 사퇴 압박을 진화하는 양상이다.
다만 스타머 총리가 완전히 위기를 넘긴 것은 아니라는 시각도 나온다. 가디언은 “내각의 지지 속에 긴박한 하루를 넘겼지만, 노동당은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우려하고 있다”며 “한 의원은 (스타머 총리의) 지도력이 ‘마지막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했다”고 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