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은 어디까지 책임이 되는가
독생자·독생녀·참부모·선민을 하나의 구원사 구조로 엮어온 과정은 특정 개념을 옹호하기 위한 여정이 아니었다. 독생자에서 독생녀로, 초림에서 재림으로, 개인 구원에서 인류 구원으로 이어진 이 사유의 흐름은 결국, ‘구원이란 무엇이며, 어디까지 가야 하는가’라는 하나의 핵심 쟁점으로 수렴된다.
기독교는 오랫동안 주된 신앙의 흐름 속에서 구원을 개인의 문제로 다뤄 왔다. 죄 사함과 믿음, 구원의 확신은 개인의 내면에서 완결되는 사건으로 이해되어 왔다. 이러한 이해는 수많은 생을 변화시킬 만큼 강력했지만, 동시에 명확한 한계를 드러냈다. 개인은 구원받았다고 말하지만, 가정은 붕괴되고, 사회는 분열돼 있으며, 인류는 여전히 전쟁과 증오 속에 고통받고 있기 때문이다.
참부모 신학은 바로 이 지점에서 문제를 제기한다. 구원이 개인 구원에서 멈춘다면, 창조는 어디에서 회복되는가. 성서의 창세기는 처음부터 인간을 단독자가 아닌 관계적 존재로 묘사했다. 남자와 여자가 함께였고, 가정이 있었으며, 그 토대 위에 사회와 역사가 세워졌다. 타락이 관계 질서의 붕괴였다면, 구원의 완성 또한 관계의 회복으로 귀결되어야 마땅하다.
통일교에서 참부모는 이렇게 정의한다. ‘타락으로 인해 거짓된 혈통 속에 놓였던 인류의 역사를 청산하고, 하나님과 직접 연결된 참사랑·참생명·참혈통의 기원을 회복함으로써, 인류가 다시 본래의 창조이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근본적 출발점을 세워 주는 존재’. 그러나 통일교의 원리 전체를 전제하지 않으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문제는 참부모라는 개념이 구원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응답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구원사의 단위를 개인에서 가정으로, 가정에서 인류로 확장하려는 신학적 시도다. 참부모는 구원이 어떤 구조로 실현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실천적 지표에 가깝다. 이 신학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참부모 신학은 신앙을 ‘믿는 것’에만 머물게 두지 않는다. 여기서 한 발 더 나가 신앙이 말하는 바가 삶의 실천으로 드러나기를 요구하며, 그 실천이 어떤 책임으로 이어지는지를 묻기 때문이다. 개인적 경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가정과 사회, 나아가 역사 속에서 구원이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문제 삼는 것이다.
구원은 초월인가, 아니면 재창조인가. 만일 구원이 이 세상을 떠나 피안의 세계로 가는 일이라면, 역사와 사회는 부차적인 문제가 된다. 그런데 구원이 창조 질서의 회복이라면, 이 세상은 버려지거나 떠나야 할 공간이 돼서는 안 된다. 떠나기 전에 책임 있게 완성되어야 할 공간이어야 한다. 참부모 신학은 후자의 가능성을 강력히 시사하며, 종말론적 파괴보다는 역사적 책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참부모 신학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구원을 기다리는 존재인가 아니면 구원에 참여하는 존재인가, 우리는 믿음의 수혜자인가 아니면 관계를 재창조하는 주체인가. 중요한 것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강요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참부모 신학은 믿으라고 명령하는 교리에서 벗어나 있다. 그보다는 생각하라고 요청하는 사유다. 그것은 예수를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가 열어 놓은 구원의 길을 삶과 역사 속에서 끝까지 따라가 보자는 제안이다.
앞서 선민은 책임을 짊어지는 공동체임을 밝힌 바 있다. 독생자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가’라는 쟁점을 인류 앞에 제기했고, 독생녀와 참부모 신학은 “그 나라가 어떻게 이 땅에 자리 잡을 수 있는가”라는 과제를 부여한다. 결국 마지막 문제는 ‘구원은 과거의 사건인가, 아니면 지금도 진행 중인 책임인가’로 집중된다. 이 문제의식 앞에서 한 가지는 분명해진다. 구원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면 그 완성은 누군가 대신 해 주는 요행이 아닐 것이다. 그 완성이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인류 각자가 어떤 관계를 선택하며 살아가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참부모 신학은 교리의 문법을 넘어 삶의 언어로 우리 앞에 서 있다.
만일 구원이 관계와 가정, 사회, 인류의 질서를 새롭게 하는 일이라면, 그 과정에서 선민은 특권일 수 없고, 믿음은 고백에 머물 수 없다. 구원은 책임이라는 형태로 확장될 것이며, 그것이 구원사의 필연적 귀결이다. 이러한 책임의 미학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 이탈리아 바로크 회화의 거장 카라바조의 〈성 마태오의 소명〉이다. 이 그림에서 구원은 지금 여기에서 응답을 요구하는 부름으로 나타난다. 예수의 손짓은 명령이 아닌, 질문이며, 마태오는 선택의 문턱에 서 있다. 이를 통해 카라바조는 구원이 개인의 내면에 머무르지 않고 삶과 역사 속에서 책임으로 시작된다는 사실을 시각화한다. 만일 구원사가 현재진행형이라면, 우리가 어떤 관계와 세계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끊임없이 살아 숨 쉬는 하나의 ‘책임의 역사’여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