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사회초년생 시절 다짐을 기억하시나요? “월급의 70%는 무조건 저축한다.” 그 성실한 약속을 지킨 분들이라면 지금쯤 뿌듯해야 정상일 겁니다. 하지만 은행 창구에서 만난 사람들의 표정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12일 오후 서울 여의도의 한 시중은행 VIP룸. 정기예금 만기를 앞둔 직장인 박모(44) 씨는 통장에 찍힌 숫자를 보며 헛웃음을 지었습니다. “원금은 지켰죠. 그런데 바보가 된 기분입니다. 입사 동기 녀석은 그때 대출 끼고 주식 사서 집 넓혀 갔는데, 저는 이자 몇 푼 받고 좋아했으니까요.” 박 씨의 허탈함은 단순한 질투가 아닙니다. 지난 10년, 대한민국 자산 시장이 성실한 저축자들에게 내밀고 있는 냉혹한 청구서입니다.
◆복리의 마법? 물가라는 ‘괴물’
박 씨의 사례를 뜯어보자. 2016년 초 1000만원을 1년 만기 정기예금에 넣고, 매년 이자를 합쳐 재예치했다고 가정해보자. 세후 기준 10년 누적 수익률은 20% 남짓. 연평균 1.8% 수준이다.
문제는 물가다. 국가데이터처 소비자물가지수에 따르면 최근 10년간 외식 물가 상승세가 이어진 가운데, 짜장면 평균 가격도 50~60% 안팎 오르며 소비자 부담이 커졌다. 김밥 가격도 소폭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숫자는 늘었지만, 돈의 실질 가치(구매력)는 오히려 뒷걸음질 친 셈이다. 경제학 교과서는 이를 ‘실질 마이너스 금리’라 부르지만, 현실의 박 씨에게는 ‘가난해짐’을 뜻한다.
◆자산 시장은 다른 세계였다
같은 기간 ‘용기’를 낸 사람들의 성적표는 달랐다. 2016년 브렉시트 충격 속 장중 1900선까지 밀렸던 코스피는 종가 기준 역대 최고치를 갈아치웠다.
그 사이 SK하이닉스는 3만원대 종목에서 수십만원대 시가총액 상위주로 도약했다. 10년이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시장의 판이 완전히 바뀐 셈이다.
부동산 격차는 더 뼈아프다. KB부동산 통계에 따르면 서울 아파트 평균 매매가격은 2016년 5억원대에서 최근 12억원 안팎까지 뛰었다.
예금만 고집한 계층은 자산 증식의 사다리에서 철저히 소외된 ‘벼락거지’가 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은행, 안전지대 아닌 ‘정거장’일 뿐
이제 은행 예금은 자산을 불리는 수단이 아닌, 잠시 돈을 맡겨두는 ‘파킹(Parking)’ 용도로 전락했다. 스마트한 돈은 이미 은행을 떠나고 있다.
5대 은행의 요구불예금은 최근 한 달 새 30조원이나 증발했다. 이 돈은 증시 대기 자금이나 고수익 채권, 해외 주식으로 흘러들어갔다.
은행 관계자는 “은퇴하신 어르신들조차 ‘이자로는 생활비 감당이 안 된다’며 투자 상품을 묻는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확실한 건 ‘무조건적인 저축=미덕’이라는 공식이 깨졌다는 사실이다. 10년 전 1000만원의 선택이 지금 당신의 자산 앞자리를 바꿨듯, 지금 당신의 여윳돈이 어디서 잠자고 있는지가 10년 뒤 당신의 노후를 결정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