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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 판결 직전 대미 투자 1호 발표해 트럼프 면 세운 日 [이주의 워싱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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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의 워싱턴 - 세계의 시선이 쏠린 워싱턴의 한 주, 핵심과 맥락을 짚습니다.

 

지난해 7월 체결된 미·일 통상·관세 합의에 따라 일본이 미국에 투자하기로 한 5500억 달러(약 797조원) 중 첫 번째 프로젝트 3개가 17일(현지시간) 발표됐다. 오하이오주의 천연가스 발전소(333억달러), 텍사스의 원유 수출 시설(21억달러), 조지아주의 산업용 합성 다이아몬드 제조 공장(6억달러)이다. 총 규모는 360억달러(약 52조원)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는 관세 압박을 통해 동맹국으로부터 투자 패키지를 얻어내고, 이를 과시할 수 있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특히 금요일(20일) 대법원의 관세 위법 판결이 나올 것이라는 예상이 있었는데도 선제적으로 투자를 발표했다. 11월 중간선거 전 지지자들에게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줘야 하는 트럼프 대통령이 원하는 것을 일본이 준 셈이다.

 

아직 투자 프로젝트의 갈 길이 멀고 일본 내에선 수익성 우려도 나오지만, 워싱턴에선 일본이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압박 위기를 양자 관계 심화와 자국 산업에 기회로 삼고 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부터). 다카이치 총리 X(엑스) 캡처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부터). 다카이치 총리 X(엑스) 캡처

◆트럼프가 원하는 것 준 일본

 

트럼프 대통령은 17일(현지시간)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트루스소셜에 일본의 첫번째 프로젝트 3개를 발표하며 “미국과 일본 모두에 매우 흥분되고 역사적인 순간”이라고 한껏 치켜올렸다. 트럼프 대통령은 직전 일본 총선에서 극우 성향의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를 지지하는 메시지를 SNS에 올리며 동맹국 선거에 개입하지 않는 관례까지 깼는데, 다카이치 총리가 이에 확실히 보답을 한 모양새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간 일본의 대미투자가 지연되고 있다고 불만을 제기했으며, 일본도 이로 인한 적잖은 진통을 겪은 것으로 알려진다.

 

일본 전문가인 윌리엄 초 허드슨연구소 선임연구원은 NYT에 “일본은 가시적인 진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했다”며 “일본의 투자 발표가 없었다면 트럼프 대통령이 (기존처럼) 25% 관세를 위협하거나 트윗 몇 개를 날렸을지 알 수 없었다”고 언급했다. 워싱턴 정가에선 3월로 예정된 다카이치 총리의 방미에 맞춰 일본이 2개 정도 추가 투자를 발표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일단 트럼프 대통령에게 가장 필요한 ‘가시적 성과’를 먼저 가져다줌으로써 일본은 미국과의 양자관계를 안정적으로 이끌 동력을 얻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대법원의 관세 적법성 판결이 곧 나올 것이라는 관측이 있었는데도 이와 상관없이 투자 의지를 선제적으로 밝힘으로써 트럼프 대통령의 ‘면’을 살려줬다. 동맹국 중에서도 특히 미국에 바짝 밀착하는 일본의 전략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19일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가 주최한 토론회에서 필립 럭 CSIS 경제프로그램 국장은 “양자 관계 차원에서 보면 일본은 현재 미국의 다른 파트너들과 비교해 상당히 유리한 위치에 있다”며 “일본은 여전히 ‘속도가 충분하지 않다’는 우려를 갖고 있지만, 솔직히 말해 현재는 한국이나 다른 나라들에 더 큰 압박이 가해지고 있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앤드류 여 브루킹스연구소 한국 석좌는 “지난 여름으로 돌아가 보면 한국과 일본은 트럼프 행정부가 더 많은 투자를 요구하는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면서도 “일본이 일부 합의를 체결하면서 이는 한국에 다소 부담으로 돌아오고 있다”고 짚었다.

 

◆일본의 ‘베팅’…위기 속 기회 찾나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와 투자 압박은 다른 국가와 마찬가지로 일본에게도 큰 부담이다. 일본 내부에서는 대미 투자와 관련 수익성에 대한 의문 뿐만 아니라 막대한 자금을 어떻게 동원할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다만 워싱턴에선 ‘어차피 온 위기’를 일본이 기회로 만들고 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20일 미 연방 대법원이 국제비상경제권한법(IEEPA)에 근거한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부과가 위법이라는 판결을 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곧바로 무역법 122조, 301조 등에 근거한 새로운 관세를 예고했으며 아시아 국가들의 무역 투자 합의를 무위로 돌리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럭 국장은 일본 내 일각에서 수익성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는 것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사실상 원래 투자하려고 했던 분야에만 투자하고 있다고 짚었다. 333억달러를 투자하기로 한 천연가스 사업과 관련 그는 “미국에서 천연가스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좋은 투자처일 것”이라며 “이 기회를 활용해 원래 하려던 투자를 진행하고 (미국) 행정부가 규제를 완화하도록 유인한다면 일본에게 이익이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트럼프 행정부에서 일본은 자동차 수출 핵심 경쟁국인 한국에 대해 관세 측면에서 불리한 위치를 극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과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으로 한국은 자동차에 무관세를 적용받고 일본은 2.5%를 적용받았으나 현재는 똑같이 15% 관세를 적용받고 있다.

 

럭 국장은 “일본은 트럼프 행정부에 큰 가치를 보여줄 수 있는 실제적인 기회가 있다”며 “예를 들어 핵심 광물 가공 분야에서는 일본이 미국보다 앞서 있다”고 설명했다. 공급망에서 확실히 자신의 영역을 확보하는 기술 발전 전략을 쓰면서 자신의 ‘몸값’을 높인 것이다. 에이브러햄 뉴먼 조지타운대 외교학대학원·정부학과 교수는 최근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군사, 첨단기술 등에서 자국 기업을 핵심 공급망에 깊이 참여시켜 다른 나라가 의존하도록 하는 일본의 전략을 ‘불가결성’(indispensability)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한국 통상 당국이 최근 미국과의 관계에서 골치를 앓고 있는 디지털 문제와 관련, 일본은 구조적으로 사정이 나은 편이다. 럭 국장은 “유럽, 한국, 인도 등은 미국의 우선순위와 충돌하는 디지털 서비스·디지털 시장 규제를 채택하고 있다”며 “반면 일본은 훨씬 더 미묘하고 절충적인(nuanced) 접근을 취하고 있다. 이는 미국 입장에서 훨씬 수용 가능해 보인다”고 짚었다. 미 디지털 업계가 한국의 온라인 플랫폼법 입법 동향 등을 주시하며 한국이 미국 기업에 차별적인 디지털 규제를 하고 있다고 주장해온 반면 일본의 디지털 정책은 이 부분에서 훨씬 자유롭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