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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듯 그린 서울… 비운듯 채운 공존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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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 백현진, 3월 21일까지 ‘서울 신택스’展

인디밴드 1세대 출신… 드라마·예능 활약
2025년 솔로 앨범 ‘서울식’ 시각적 재구성

‘멈춤’ ‘난제’… 드로잉·영상 30여점 선봬
규칙과 오류 등 ‘느슨한 조화’ 녹여내

날씨 탓인가. 북유럽 경험도 제법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컨디션이 저조했다. 전시 준비도 하고 현지에서 작업도 해야 했지만, 마음은 복잡하고 몸은 착 가라앉아 버렸다. 베스트포센 미술관에서 열리는 그룹전을 위해 한 열흘 정도 북유럽 노르웨이에 머무르고 있던 지난해 3월 무렵이었다.

찬찬히 되짚어보니 날씨 때문이 아니었다. 무리하지 않는 삶에 관심도 많았고 실제 그렇게 살려고 노력도 해온 그였지만, 최근 몇 년간 너무 많은 일을 해오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티스트이자 인디밴드 1세대 출신의 싱어송라이터, 배우로서 백현진(사진)은 최근 몇 년간 전시장과 무대, 스크린을 종횡무진 내달렸다. 특히 드라마 ‘모범택시’ 속 ‘갑질 회장’ 역이나 쿠팡플레이의 예능 ‘직장인들’에서 ‘백 부장’ 캐릭터로 대중에게 자신을 크게 알리지 않았던가. 아, 이게 사람들이 말하는 번아웃이라는 것이구나.

지난해 쿠팡플레이 ‘직장인들’에서 ‘백 부장’ 캐릭터로 대중의 사랑을 받은 배우이자 싱어송라이터인 아티스트 백현진의 개인전 ‘서울 신택스’가 지난 4일부터 서울 삼청동 PKM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PKM갤러리 제공
지난해 쿠팡플레이 ‘직장인들’에서 ‘백 부장’ 캐릭터로 대중의 사랑을 받은 배우이자 싱어송라이터인 아티스트 백현진의 개인전 ‘서울 신택스’가 지난 4일부터 서울 삼청동 PKM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PKM갤러리 제공

오히려 젊은 시절에는 번아웃이란 개념도, 실제 번아웃도 없었다. 미술가와 뮤지션, 배우로서 시장에서 성과가 거의 없는 탓에 먹고사는 것 자체가 막막했고 계속 낙담해 왔던 시절이었으니까.

노르웨이 그룹전을 마치고 돌아온 백현진은 황량한 시간을 거친 뒤에야 다시 캔버스 앞에 설 수 있었다. 그 사이 좋아하던 술과 담배도 끊었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확 줄였다. 번아웃에서 빠져나와 지난해 9월부터 담담하게 붓질할 수 있었다. 붓끝을 타고 백지 위에는 그동안 그의 몸과 마음에 응고돼 있던 풍경과, 감정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비운 듯 채워지고, 반복적 패턴 속에 담담한 색이….

“그림이 그렇게 보이신다면 아마 맞을 겁니다. 그림에 대한 느낌에 대해서, 제가 맞다 틀리다고 말할 건 아닌 것 같아요. 언어로 제대로 표현할 수 없어 그린 작품들이니까요. 여기 있는 그림들은 작년 번아웃 시기에 만들어진 작품들이긴 해요. 개인적인 여러 문제로 마음이 좀 복잡하고 많이 가라앉아 있었던 상태에서 그린 것들이죠.”

‘멈춤’(2025). PKM갤러리 제공
‘멈춤’(2025). PKM갤러리 제공

다재다능한 아티스트 백현진의 개인전 ‘서울 신택스(Seoul Syntax)’가 지난 4일부터 서울 삼청동 PKM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3월21일까지. ‘서울 신택스’라는 타이틀은 ‘서울식’을 영어로 옮긴 표현으로, 지난해 발표한 솔로 앨범의 제목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대도시 서울을 소리로 표현한 작업이 앨범 ‘서울식’이라면, 이번 개인전은 그 시각적 결과물인 셈이다.

이번 개인전에는 나무 같기도 하고 숲 같기도 한 곳에 사람이 누워 있는 듯한 작품 ‘멈춤’을 비롯해 변화와 공존을 거듭하는 동시대 ‘서울’의 모습이 담긴 장지 페인팅과 드로잉, 비디오 영상 작품 30여점이 전시됐다. 작품들은 서울이라는 공간 속 리듬과 어긋남, 규칙과 오류의 공존을 보여준다는 평가다.

작품 ‘난제’ 역시 엇비슷한 나무나 숲 패턴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대책 없이 맞선 검은 모양이 그림 전체를 압도하며 관객의 시선을 붙잡고, 갈팡질팡하는 색깔의 도형들이 두툼한 한지에 그려진 ‘갈팡질팡’은 화면을 위에서 아래로 가로지는 금색 스프레이 선이 다른 색들의 선들과 묘하게 삐걱대면서 어우러지는 게 인상적이다.

‘갈팡질팡’(2025), 213*150cm. PKM갤러리 제공
‘갈팡질팡’(2025), 213*150cm. PKM갤러리 제공

갤러리 지하에서 관객을 맞는 비디오 작품 ‘빛 23’은 영화 ‘미나리’의 한예리 배우와 영화 ‘기생충’의 홍경표 촬영감독이 참여한 작품으로 해질 무렵 서울 근교에서 원테이크 기법으로 촬영한 영상이다. 날씨 변화와 인간의 희로애락이 낭만적으로 담겨 있다.

콜롬비아 소설가 안드레스 솔라노가 “노래하듯 그림 그리고, 연기하듯 노래하며, 그림 그리듯 연기한다”고 평한 백현진은 왜 느슨한 구성과 반복적 패턴 속에 리듬과 어긋남이 공존하는 그림을 그려야 했을까. 지난 5일 서울 삼청동 PKM갤러리에서 만난 백 작가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릴 개인전을 준비하던 지난해 1월, LA에서 큰 산불이 났는데, 아마 그때쯤 풀인지 식물인지 산인지 모를 그림을 단순하게 반복해 그리고 있더라”며 “반복돼 비슷한 패턴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또 다 다르다”고 말했다.

1972년 서울에서 태어난 백현진은 1996년 그룹전 ‘살’을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래 미국, 영국, 독일, 이탈리아, 대만 등지에서 다수의 개인전을 열어왔다. 국립현대미술관과 리움미술관, 일민미술관, 아트선재센터, 상하이 민생현대미술관, 쿤스트할레 빈 등 세계 유수의 미술기관 그룹전에 참여하기도 했다. 2017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후원작가로 선정됐다.

‘난제’(2025), 213*150cm. PKM갤러리 제공
‘난제’(2025), 213*150cm. PKM갤러리 제공

2000년대 초반 백 작가의 샤프 드로잉 작품을 본 이래 교류를 이어온 박경미 PKM갤러리 대표는 “현대 미술의 포괄적인 영역에서 어떻게 보면 가장 당대적인 비전을 갖고 총체적인 역할을 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이 충만한 젊은 작가”라고 평가한다.

백 작가는 ‘전방위 예술가’라는 저간의 평가에 대해 “그냥 직업이 몇 개 있을 뿐“이라며 “무대 연출도 해보고 영화도 찍어봤지만, 지속적으로 계속하는 일은 아니고, 직업으로서 오래 해온 것은 미술가와 음악가, 배우의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더 나이 먹고 생물학적으로 쇠했을 때에는 아무래도 화가로 그림을 더 많이 오래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촬영을 하거나 작업실에 가 있는 것을 제외하면, 백현진은 대체로 집에서 뒹군다. 최근 21년간 살았던 서울 연남동에서 망원동으로 이사했다. 근처 구민 운동장에서 조깅을 하기도 하겠지만, 그냥 누워 있는 것을 좋아한다. 때론 멍 때리기도 하고 생각만 분주히 할 것이다. 아마 CCTV로 보면, 아니 저렇게 게으른 인간이었나, 라는 말이 터져 나올지도.

그것은 아마 아티스트이자 싱어송라이터, 배우로서 전시장과 무대, 스크린을 종횡무진 내달리기 위한 맹렬한 ‘멈춤’일 터. 나무 같고 숲 같은 곳에서 누워 있는 사람처럼. 그리하여 어느 봄쯤 르네상스인 백현진은 기어코 붓을 들 것이다. 이미 캔버스는 주문해 놓았고, 작업실도 청소했으니까. 알 수 없는 호기심과 자명한 진리, 새로운 재미와 오랜 감동이 벌써 그림 사이에서 기웃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