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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감고 ‘던전’ 돌아보셨나요?”…청각으로 게임 즐기는 시각장애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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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배리어프리’ 현장 가보니

시각장애인 4명 ‘디아4’ 플레이
화면·모바일 낭독 서비스 제공

길 안내 음성, 특정 구역선 ‘뚝’
기능성 게임 위주 한계 지적도
“문화콘텐츠 동등한 향유 원해”

“찾았어요!”

 

20일 오후 7시, 함께 게임을 하기 위해 모인 시각장애인 4명이 게임 ‘디아블로4’ 속 ‘던전’에서 다른 공간으로 넘어가기 위한 ‘포털’을 찾기 위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4명 중 유일하게 잔존 시력이 남아있는 저시력 시각장애인 서예림(31)씨는 이 중 포털을 가장 잘 찾아 ‘아비서(게임 캐릭터명 ‘아이린’+비서)’로 불린다. 서씨가 ‘포털을 찾았다’고 외치자 다른 플레이어들이 ‘파티원에게 순간이동’ 기능을 클릭해 찾던 공간으로 넘어간다.

 

전맹 시각장애인 김준형씨(34)는 20일 오후 다른 시각장애인 3인과 게임 ‘디아블로4’를 플레이하는 모습을 유튜브 채널에 생중계했다. 영상에는 “명공의 나락 완료. 나락(77단계)”라는 문구가 띄워져 있다. 유튜브 영상 캡쳐.
전맹 시각장애인 김준형씨(34)는 20일 오후 다른 시각장애인 3인과 게임 ‘디아블로4’를 플레이하는 모습을 유튜브 채널에 생중계했다. 영상에는 “명공의 나락 완료. 나락(77단계)”라는 문구가 띄워져 있다. 유튜브 영상 캡쳐.

지난해 9월부터 함께 모여 게임을 하던 이들이 찾은 나름의 노하우다. 디아블로는 시각장애인도 게임을 즐길 수 있도록 ‘스크린리더(화면 낭독)컴퓨터나 모바일 화면의 텍스트를 읽어주는 소프트웨어)’ 기능을 탑재한 몇 안 되는 역할수행게임(RPG)이지만, 여전히 한계는 있다. 디아블로 게임 내에서 시각장애인 사용자들은 ‘북소리’ 같이 들리는 길 안내 기능을 통해 장애물을 피하고 길을 찾는데, 이 소리가 ‘던전’에만 들어가면 뚝 끊긴다.

 

◆‘접근성’만 개선되면 비장애인처럼 게임 즐길 수 있어

 

이 모임을 만들고 게임 유튜브를 운영 중인 김준형(34)씨는 “맹인이 사방으로 흩어져서 찾으면 누구 하나는 길을 찾는다”면서도 기능이 개선되면 더욱 쉽게 게임을 즐길 수 있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내비쳤다. 함께 게임을 즐긴다는 장용전 종로인명장애인자립생활센터 사무국장은 “시각장애인이 게임을 할 거라고 생각을 안해서 이런 쪽으로 아예 신경을 안쓰는 것에 비해 블리자드에서 신경을 많이 써준 것”이라면서도 “시각장애인이 개발에 참여하지 않아서 그런지 미진한 부분들이 많은 것 같다”고 했다.

 

게임이 처음 출시됐을 때에 비하면 많이 나아진 편이다. 이 게임을 초창기부터 해왔다는 서씨는 “당시 스크린리더 기능이 있다고 해서 시작했는데 사실상 작동이 안됐다”며 “문을 열라고 하는데 도대체 문이 어디있는지, 어느 방향으로 가야하는지 알 수 없었다”고 말했다.

 

전맹 시각장애인 황인상(32)씨가 모니터 없이 헤드폰만 착용한 채 게임 ‘디아블로4’를 플레이 하고 있는 모습. 유경민 기자
전맹 시각장애인 황인상(32)씨가 모니터 없이 헤드폰만 착용한 채 게임 ‘디아블로4’를 플레이 하고 있는 모습. 유경민 기자

기능만 제대로 작동한다면 시각 대신 다른 감각들로 게임을 즐기는 데 문제가 없다. 게임을 좋아하는 김씨의 캐릭터 레벨은 벌써 ‘만렙(300)’에 가까운 레벨 296을 달성했다. 게임 내에서 비장애인 플레이어에게 도움을 주기도 한다. 이들과 같은 게임 길드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비장애인 주모(44)씨는 “처음 게임을 시작했을 때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길드를 찾다가 가입하게 됐는데 길드장인 김씨가 함께 던전을 돌고 아이템에 대해서도 일일이 알려줬다”고 했다.

 

이들에게 게임은 각별한 문화 콘텐츠다. 김씨는 “전맹이 아니라 시야가 좁은 시각장애인이었던 어린 시절 친구들과 운동장에서 공놀이를 하는 건 힘들었는데 게임은 잘해서 동네 형들에게 예쁨을 받고 만족감과 자존감이 높아진 추억이 있다”고 추억했다. 함께 게임을 즐기는 박동희(40)씨도 “어린 시절 크레이즈아케이드 등 재미있는 게임이 많이 나왔고 게임 방송을 하는 채널도 많았다”며 “남들 하는 거 다 하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다”고 했다.

 

시각장애인은 시각 대신 청각으로 길을 찾고, 그래픽 대신 사운드와 성우의 목소리에 감동하며, 조이스틱에 느껴지는 진동으로 게임을 즐긴다. 김씨는 “디아블로4를 처음 접속했을 때 한국어로 더빙된 웅장한 시네마가 나와 눈물이 났다”며 좋은 아이템이 나오면 전율이 일어난다”고 했다.

 

전맹 시각장애인인 김준형(34·왼쪽)씨와 저시력 시각장애인 서예림(31·오른쪽)씨, 박동희(40·건너편)씨가 20일 저녁 서울 종로구에 모여 게임 ‘디아블로4’를 플레이 하고 있다. 유경민 기자
전맹 시각장애인인 김준형(34·왼쪽)씨와 저시력 시각장애인 서예림(31·오른쪽)씨, 박동희(40·건너편)씨가 20일 저녁 서울 종로구에 모여 게임 ‘디아블로4’를 플레이 하고 있다. 유경민 기자

◆“어릴 때 즐겼던 메이플스토리 다시 하고 싶다”

 

어릴 때 재미있게 했던 메이플스토리 같은 게임이나 배틀그라운드, 리그오브레전드 같이 대중적인 게임들도 하고 싶다는 게 이들의 소망이다.​

 

국내에서도 장애인의 게임 접근성을 개선하는 ‘게임 배리어프리’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지만, 갈 길은 멀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지난해 10월 한국콘텐츠진흥원과 장애인도 제약 없이 자유롭게 게임을 즐길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게임 접근성 가이드라인’을 만들었다. 시각장애인 접근성을 위해 모든 메뉴와 알림에 대한 음성 안내 제공, 플랫폼 기본 스크린리더 호환을 개발 시 참고하라는 내용 등이 담겼다. 그러나 인기 게임 중 이런 기능이 탑재된 게임은 찾기 힘든 현실이다.

 

문체부는 또 장애인의 게임 접근성 관련  게임의 재미요소와 교육, 예방치료 등 사회적 기여가 결합된 ‘기능성 게임’ 제작, 전국 장애인 이스포츠 대회·이페스티벌에 올해 총 14억여원의 예산을 편성해 지원하고 있다. 그러나 문체부가 지원하는 ‘기능성 게임’은 대부분 교육이나 의료, 사화공헌 목적의 게임으로 일반적인 인기 게임과는 거리가 있다.

 

김씨는 시각장애인도 비장애인과 동일하게 게임이라는 문화콘텐츠를 즐길 수 있도록 인식을 개선하고 싶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그 첫걸음으로 디아블로4의 접근성 개선을 위한 제안서를 게임 개발사 ‘블리저드’에 제출하기로 했다. 제안서에는 △게임 내 스크린리더 시스템 전면 개선 △던전 내 음성 길안내 정상 작동 △대상 고정 상태의 명확한 사운드 피드백 등의 내용이 담겼다. 김씨는 “지난해부터 몇몇 게임사들이 시각장애인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움직임이 있는 것 같은데 이번 제안서가 나비의 날개짓이 되었으면 좋겠다”며 “디아블로4를 시작으로 배틀 그라운드, 리그 오브 레전드 같은 게임 회사에도 개선 요청을 할 예정”이라고 했다.